1987, 납치된 머리카락

by 루달




오랜만에 목욕을 해서 그런지

얼굴이 괜히 예뻐 보이는 토요일 오후였다.

기분도 상쾌해서, 루루~ 하며 집을 나섰다.


집에서 골목을 쭉 2분 정도 걸어 나오면

복덕방이 있었고,

그 옆에 장의사,

그 옆에 맛나 식품,

그렇게 차르르 붙어 있었다.

차도에는 57번, 58번 버스가 다녔다.


이건 집 구하러 왔다가

장례 치르고

라면 사고

버스 타고 집에 가라는 동선 같았다.

그 앞에

하늘색 공중전화가 두 칸, 나란히 있었다.


갑자기 친구한테 전화가 하고 싶어졌다.

공중전화 여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

20원을 넣었다.


첫 번째 친구는 전화를 안 받았다.

그래서 다른 친구에게 걸었지만 안 받았다.

에이, 짜증.


나오려고 몸을 돌리는데

줄 서 있던 여자애 하나가

내가 완전히 나오지도 않았는데

여닫이 문을 확 열고 들어오려 했다.


그 순간

내 뒷발꿈치가 문에 찍혔다.

피부가 파이고 살짝 피가 났다.

근데 걔는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쏙 들어가서 전화를 했다.


나는 통화가 끝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한마디는 해야겠어서.


전화를 금방 끝나고 걔가 나왔다.

저기.. 상처 났는데요. 사과는 해야죠?”

“아, 미안~”

툭.

던지듯 말하고,

내 상처는 아랑곳없이 천천히 걸어갔다.

나는 속에서 부글부글 천불이 났다.


그래서 빨리 걸어가서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저기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걔가 다짜고짜 내 머리를 잡아당겼다.



“아야아야 아야—”

"아악!! 미쳤어?!”
“햐아!! 머리!!”
“손 놔!! 손 놔 이년아!!”
“아프다고!! 아프다고!!”
“머리카락 다 뽑아진다고!!”
“놔!! 놔라!!”
“이거 안 놔?!”

먼저 놔!!”

“네가 먼저 놔!!”


사람 죽고 사는 일 처리하는 장의사 앞에서

중학생 둘이 머리 잡고 실랑이 중이었다.


“자, 그럼 하나 둘 셋 하면 놔!!”

“그러던가!”


근데 카운트다운 구호에서

둘 다 동시에 놓는 척하다가 다시 끄잡았다.


“야!! 아니 왜 또 잡아!!”

“네가 먼저 잡았잖아!!”


그 사이

57번 버스가 그냥 지나갔고,

복덕방 문이 열렸고,

맛나 식품 아저씨가 인도로 나왔다.

장의사, 복덕방, 슈퍼 주인까지

하나둘 모여

우리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결국 너무 아프고 지쳐서
정의도 명분도 없이
둘 다 동시에 놨다.


“야, 너 몇 학년이야!!”

“나? 너 먼저 말해!!”

“중1!!!”

“나도!!”


그다음부터는 싸움이 아니라

각자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이 돌아갔다.


우리 학교인가?

어느 반이지?

내일 마주치면 어떡하지?


그때 슈퍼 아줌마가

그 애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야, ○○아. 목사 딸이 길거리에서 싸우면 돼?”


개인 정보가 유출되는 순간

둘 다 동시에 굳었고,

천사 모드로 얼굴색이 싹 바뀌었다.

내 천사가 먼저 드러났다.


"어느 교회야? 미안해.. 나도 OO교회 반주자야"

"아 그래? 미안해. 사실 오늘 안 좋은 일이 있었어 "


머리는 산발,

손에는 머리카락 한 뭉치를 쥔 채

화해의 악수를 했다.


조금 전 까지는 쥐라기 공룡 육탄전,

지금은 해탈한 스님,

사랑을 담당하는 테레사 수녀.



그리고는

서로를 보내줬다.


며칠 뒤였다.
집에서 나오다가 벽을 스치는데
갑자기 옷이 확 잡아당겨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야! 놔! 놔라 당장!!”

사람도 없는데
나는 혼자 길 한가운데서
누군가에게 끌려가는 연기를 하고 있었다.
심지어
진짜 화가 나 있었다.


뒤돌아봤더니
벽에 튀어나온 돌모서리가
내 옷을 낑겨 잡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옷을 빼고
아무 일 없다는 얼굴로 집에 다시 걸어갔다.


그날 이후
나는 사람뿐 아니라
벽도 함부로 안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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