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목욕을 해서 그런지
얼굴이 괜히 예뻐 보이는 토요일 오후였다.
기분도 상쾌해서, 루루~ 하며 집을 나섰다.
집에서 골목을 쭉 2분 정도 걸어 나오면
복덕방이 있었고,
그 옆에 장의사,
그 옆에 맛나 식품,
그렇게 차르르 붙어 있었다.
차도에는 57번, 58번 버스가 다녔다.
이건 집 구하러 왔다가
장례 치르고
라면 사고
버스 타고 집에 가라는 동선 같았다.
그 앞에
하늘색 공중전화가 두 칸, 나란히 있었다.
갑자기 친구한테 전화가 하고 싶어졌다.
공중전화 여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
20원을 넣었다.
첫 번째 친구는 전화를 안 받았다.
그래서 다른 친구에게 걸었지만 안 받았다.
에이, 짜증.
나오려고 몸을 돌리는데
줄 서 있던 여자애 하나가
내가 완전히 나오지도 않았는데
여닫이 문을 확 열고 들어오려 했다.
그 순간
내 뒷발꿈치가 문에 찍혔다.
피부가 파이고 살짝 피가 났다.
근데 걔는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쏙 들어가서 전화를 했다.
나는 통화가 끝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한마디는 해야겠어서.
전화를 금방 끝나고 걔가 나왔다.
“저기.. 상처 났는데요. 사과는 해야죠?”
“아, 미안~”
툭.
던지듯 말하고,
내 상처는 아랑곳없이 천천히 걸어갔다.
나는 속에서 부글부글 천불이 났다.
그래서 빨리 걸어가서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걔가 다짜고짜 내 머리를 잡아당겼다.
“아야아야 아야—”
"아악!! 미쳤어?!”
“햐아!! 머리!!”
“손 놔!! 손 놔 이년아!!”
“아프다고!! 아프다고!!”
“머리카락 다 뽑아진다고!!”
“놔!! 놔라!!”
“이거 안 놔?!”
“먼저 놔!!”
“네가 먼저 놔!!”
사람 죽고 사는 일 처리하는 장의사 앞에서
중학생 둘이 머리 잡고 실랑이 중이었다.
“그러던가!”
근데 카운트다운 셋 구호에서
둘 다 동시에 놓는 척하다가 다시 끄잡았다.
“야!! 아니 왜 또 잡아!!”
“네가 먼저 잡았잖아!!”
그 사이
57번 버스가 그냥 지나갔고,
복덕방 문이 열렸고,
맛나 식품 아저씨가 인도로 나왔다.
장의사, 복덕방, 슈퍼 주인까지
하나둘 모여
우리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결국 너무 아프고 지쳐서
정의도 명분도 없이
둘 다 동시에 놨다.
“야, 너 몇 학년이야!!”
“나? 너 먼저 말해!!”
“중1!!!”
“나도!!”
그다음부터는 싸움이 아니라
각자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이 돌아갔다.
우리 학교인가?
어느 반이지?
내일 마주치면 어떡하지?
그때 슈퍼 아줌마가
그 애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개인 정보가 유출되는 순간
둘 다 동시에 굳었고,
천사 모드로 얼굴색이 싹 바뀌었다.
내 천사가 먼저 드러났다.
"어느 교회야? 미안해.. 나도 OO교회 반주자야"
"아 그래? 미안해. 사실 오늘 안 좋은 일이 있었어 "
머리는 산발,
손에는 머리카락 한 뭉치를 쥔 채
화해의 악수를 했다.
조금 전 까지는 쥐라기 공룡 육탄전,
지금은 해탈한 스님,
사랑을 담당하는 테레사 수녀.
그리고는
서로를 보내줬다.
며칠 뒤였다.
집에서 나오다가 벽을 스치는데
갑자기 옷이 확 잡아당겨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야! 놔! 놔라 당장!!”
사람도 없는데
나는 혼자 길 한가운데서
누군가에게 끌려가는 연기를 하고 있었다.
심지어
진짜 화가 나 있었다.
뒤돌아봤더니
벽에 튀어나온 돌모서리가
내 옷을 낑겨 잡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옷을 빼고
아무 일 없다는 얼굴로 집에 다시 걸어갔다.
그날 이후
나는 사람뿐 아니라
벽도 함부로 안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