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설날은 상시근무였다.

by 루달




명절 전날, 귓불까지 에어지는 시린 오후였다.

날씨보다 내 일정이 더 살벌했다.

우리 집은 큰집.

명절이라 친척들이 몰려왔고,

엄마는 음식 장만으로 분주했다.

나한테 만 원을 쥐여주며

정육점에 가서 동그랑땡 만들 돼지고기 간 거랑

불고기 잴 고기를 사 오라고 했다.

그나마, 이 임무는 명절 중 가장 평화로웠다.


정육점 아저씨신문지에 돌돌 말아 싸주셨다.

헤드라인은 기억 안 나고, 고기 냄새만 코를 훑었다.

집에 와 보니, 마루에는 또 신문지가 쫙 깔려 있었다.

우리 집에서 신문은 바닥재 역할이었다.

엄마는 고기도 내려놓기 전에


“거기 앉아서 동태 전이나 붙여!”


난 눈 풀린 동태눈알과 눈이 마주쳤다.

서로 측은해하며 할 말은 없었고,

계란 두 판을 자동 기계처럼 깼다.


도 닦는 마음으로 하나씩 뒤집는데,

신발장위에 누전차단기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전은 튀기고, 전기도 튀었다.


엄마가 의자를 올라가 차단기를 올리자 또 떨어졌다.

누전 차단기는 설날 휴무를 선언했다.


나는 전을 부치면서도 계속 심장이 쫄고 있었다.

변압기랑 두꺼비집은 동시에 불꽃과 연기가 피었다.

느닷없이 산업현장이 됐다.


엄마는 화장실로 뛰어가 대야에 을 담아 와

냅다 도란스에 부어버렸다.

갑자기파팍 스파크가 튀었고,

나는 설날 최초의 대피 인원이었다.



엄마는 부들부들 떨며 급히 전화를 하셨고,

곧 전기 고치는 아저씨 두 분이 왔다.

변압기랑 두꺼비 퓨즈를 갈아야 한다고 했다.

공사는 지속됐고, 집은 점점 암흑으로 빠졌다.

작은아버지랑 엄마는 회의 끝에,

명절은 통닭으로 약식 추모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두 시간 만에 공사가 끝나고 불이 켜졌다.

친척들은 다시 음식을 하자고 했다.

설날은 거룩하게 부활했다.

전은 전기를 이겼고, 명절은 재부팅됐다.


각자 외출했던 친척들이 하나씩 복귀했다.

막내고모 여시는 음식 장만이 다 끝나면 왔고,

둘째 고모는 성수동에서 고깃집 장사를 끝내고 왔다.


작은아버지들은 바둑, 장기를 두다가

오빠랑 동생을 다 끌고 탁구장에 갔다.

사촌 동생들은 부루마블 게임을 했고,

집은 다시 여자들만 남았다.


그때 여시 막내고모가 늘에 실을 꿰어 주었다.

나를 보더니 뱃속의 아이 성별을 맞혀보라 했다.

실을 고모 배 위에 올렸고, 곧 바늘이 빙빙 돌았다.


"보자 보자 또 딸이네! 딸!"


아무 검증 없이 속보가 나갔다.


과학은 잠시 집을 나갔다.

내 예언은 자막 없이 확정됐고,
리허설 없이 생방으로 방출됐다.


옆에 있던 친척들은 웃었고, 아들을 바라던

여시 고모는 꺼냈던 지갑을 조용히 퇴장시켰다.


'앗 아들이라 말할걸'


후회는 했지만 내 주둥아리는 속보형 인간이었다.


저녁이 깊숙해질 때 큰고모는 동생들이

우리 집에 모여 있어서 얼굴만 보러 왔다가,

얇은 담요를 반듯하게 접더니 바로 화투를 꺼냈다.


고스톱은 점 십 원짜리였다.

엄마는 화투도 못 치면서 부자인 큰고모 옆에 앉아

과일을 입에 넣어주고 돈을 수거했다.



막내 삼촌의 입에서 맥주 얘기가 나왔고,

장가나 가라 했고, 제야의 종과 함께 불이 꺼졌다


아침 8시가 됐다.

나는 친척들이 주무셨던 이불을 이리저리 걷고,

쓰레받기랑 빗자루를 들고 대충 쓸고 다녔다.

삼촌들은 자개농 위에 큰 상을 꺼내 다리를 펼쳤다.


엄마가 행주를 툭 던지면 난 '슝' 받고.

상위에 먼지들을 슬렁슬렁 닦았다.

늘 딱갈이였다.


우리는 둘러앉아 생전에 아빠가 좋아하시는

통닭 앞에서 추모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대표기도를 지정하려는 순간,

동시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둘째 고모는 절실한 불교 신자라 종교 사유로 탈락.
막내삼촌은 숙취로 얼굴이 벌게 져서 부정 탈까 패스.

엄마는 전기에 물을 부어버린 걸로 0순위 명예 패스.

결국
아무 사유도 없는 작은아버지가 대표기도를 하셨다.



모두가 떡국을 오손 도손 먹은 뒤,

설날 하이라이트! 세뱃돈 이동 시간이다.

작년보다 천 원 인상돼 2천 원씩 지급받았다.
물가 상승은 아이에게도 공평했다.


친척들은 부침개, 잡채등을 싸가지고 가셨고,

엄마는 작은 아버지들이 건네준

현금봉투를 꺼내 보면서 밝아지셨다.

설날 해는 정동진 말고, 엄마 얼굴에서 떴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세배는 내가 했는데,

현금은 엄마 쪽으로 입양되었다.




2026년 (丙午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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