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손엔 도시락통, 한 손엔 폐품을 들고도
걸리적거림 하나 없는 가을의 한가운데 날씨였다.
미술 수업 시간이었다.
사생대회에서 상을 받아
학교 대표로 밖에 나갔다 온 뒤였다.
그래서 선생님이 나를 예뻐한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수업 중에 오줌이 마려워 손을 들고 화장실에 갔다.
화장실문들은 전부 열려 있었고,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안심했고, 맨 안쪽으로 들어갔다.
오른쪽은 벽이었고,
왼쪽은 칸막이가 있었다.
그 칸막이는 아래가 트여 있어
옆칸에 누가 있으면 실내화가 보였다.
난 앉아서 쉬야를 했다.
근데 시원함을 방출한 뒤
부르르 떠는 소름이 아니라,
처음 겪는 싸늘함이 온몸을 훑었다.
으스스한 공기에 빨리 일어나려는데
왼쪽 눈 시야에 쓰윽 스치는 여운이 보였다.
왼발 옆, 7시 방향으로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긴 머리카락이 바닥에 닿아 있었다.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끝만 닿아 있었다.
분명 화장실에 나 혼자 전세 냈는데 이상했다.
고개를 더 숙였다. 검고 긴 머리카락이 확실했다.
마치 바닥에 착지 실패한 해조류 모습이었다.
사람이 거꾸로 있지 않으면 설명이 안 되는 위치였다.
나는 생각을 멈췄고,
비명은 선택이 아니고 반사였다.
포효 소리를 뿜으며 복도로 뛰쳐나갔다.
난 사람이 아니라 경보음 쪽에 가까웠다.
수업하던 선생님들은 헐레벌떡 먼저 나왔고
아이들도 금세 다 뛰쳐나왔다.
난 거의 실신 직전이었고 양호실로 갔다.
한 시간쯤 떨다가 잠들었고,
또 기가 막히게 잘 잤다.
인간은 무서우면
자동으로 꺼진다.
다시 수업에 들어갔고, 애들이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귀신을 봤다고 했다.
그 말 이후로, 애들 시선이 더 무서워졌다.
귀신은 혼자 보지만
소문은 단체로 본다.
수업이 끝났고, 집에 가는 길에
평소 때처럼 야무지게 떡볶이를 사 먹었다.
오늘의 충격은 떡볶이 국물에 완전히 밀렸다.
귀신은 내가 질렸는지 그 뒤로 코빼기도 안보였다.
결국 공포 체험은 자동이체처럼 빠져나갔다.
신청한 적도 없는데 해지는 더 쉬웠다.
며칠 뒤
저번에 소개팅했던 마음 건강이 불편한 선배한테
피아노 레슨을 하러 갔다.
집은 컸고 선배의 눈도 컸다.
피아노 앞에 앉으라 했고
열쇠구멍에 배꼽을 맞추라고 시켰다.
선배는 장래희망인 대통령처럼 옷을 입었고,
단추까지 풀며 배꼽을 맞추려고 했다.
그리고 바이엘을 치기 전에
오선줄부터 노트에 그리라고 했다.
음표 위에 계이름을 쓰라고 했는데
도인지 다인지 디인지 헷갈리게 썼다.
그래서 음악은 잠시 미뤄두고
한글을 연습했다.
도
도
도
도
일주일에 두 번 갔는데 진도는 늘 도레미였다.
도만 장기체류비자였다.
우리의 레슨 장면은 마치
도를 전자레인지에 넣고 60분 돌린 느낌이었다.
난 그렇게 도를 닦는데 선배는 나보고
영화 보러 가자고 했다.
"재미이히 있다.
여영화. 보러 가. 같이"
도는 느리고, 팝콘 상상은 빨랐다.
선배 엄마가 그 얘기를 듣고선
나보고 잠깐 나오라고 했다.
그리고 한숨을 쉬시며 이제 안 와도 된다고 했다.
선배 엄마는 바짝 몸을 당기며,
내 손을 붙잡고 얘기를 하셨다.
선배 어릴 적에 이혼을 했고,
아빠는 외국에 갔다고 거짓말을 했다고...
어른들은 설명 대신 거짓말을 먼저 배운다.
그 뒤로 선배는 비행기만 조립했었고,
실어증이 되었고, 특수학교대신
일반 학교로 보냈다고 했다.
내 첫 남자는 이렇게 끝났고, 남자는 없었다.
ㆍ
ㆍ
몇 년 후.
까불던 우리 오빠가 수재가 됐었다.
그리고 대학 가서는 말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교회에서 반주를 하는데
정면에 오빠가 앉아있는 게 보였다.
갑자기 설교 중간에 큰 소리로 방해하듯이,
"아멘!! 아아 멘!! 아아아 멘!!"
평소의 오빠 목소리가 아니었고 이질적이었다.
그 순간 나는 울었다. 소리 없이 온몸이 물을 짰다.
'아, 뭔가 큰일 났다'
본능적으로 그 생각만 내려왔고,
쏟아지는 눈물에 가려져 악보가 희미했다.
오빠는 집사님들에게
양팔을 부축인 채 끌려나갔다.
그리고 집에 와서
오빠는 눈이 시뻘게졌다.
곧 부엌을 사정없이 뛰어가더니
식칼과 바가지에 소금을 담아왔다.
현관에 소금을 팍팍 뿌리고
바가지위로 칼을 눕혔다.
우리 엄마랑 나는 처음 겪어 보는 공포에
껴안고 부들부들 울었고 불안만 남았었다.
한양대학병원에 갔는데 크게 이상은 없다고 했다.
절대 안정시키라고 했다.
오빠는 다니던 대학에서 운 좋게 졸업장은 받았다.
그 후부터 친구, 친척, 세상과 단절하고...
종이로 로봇만 만들었다.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자기 방에서, 자기 세계에서만 산다.
화장실 갈 때도 열쇠로 잠그고 가고...
남동생도 대학 졸업한 이후
아주 심한 분열증이 왔다.
정신병원을 몇 번씩 오고 갔고,
구급차가 우리 집을 자주 왔다.
그야말로 동네 유명인사가 됐다.
급기야 잠실대교, 성내천 고가 다리에서 떨어졌다.
계속되는 자살시도로
아산, 경찰 병원 중환자실을 살다시피 했다.
엄마는 버티기 힘들었다.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그때 우리는 조현증에 관한 어떤 정보도 없었다.
집은 초토화였다.
심하게 말하자면 정신병원 같았다.
사는 건지 숨만 쉬는 건지..
엄마와 나는 하루라도 조용한 날이
그저 감사한 날이었다.
결국 친척들과 상의 끝에
나는 집을 나와 출가했다.
결국 '도'란
닦는 게 아니라
겪고 이겨나가는 것.
21회부터는 성인 루달이예요.
(1999년~2002년 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