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누나 냄새가 끝내줘

by 루달


옥상의 빨래집게 사이에서

한 줄기 바람이 튀어나와 볼터치를 했다.

기분 좋은 예감이 밀려오는 주말이었다.


이모가 아들을 데리고 왔다.

어릴 때 한 번 보고

그다음부턴 증발에 가까웠다.

나보다 두 살 어렸고, 내 동생이랑 동갑.


원래 이런 날은 또래끼리 붙어 다니는 법인데

이상하게 걔는 내 동생을 지나쳐

나한테 직행했다.

누나.

누나아.

누나아아.

호칭이 과했다. 근데 싫지 않았다.

사람이 누나 소리 들으면 마음이 약해진다.


가만 보니까굴이 낯설지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목이 먼저 알아봤다

목주름이…

나랑 닮아 있었다.



얼굴은 거짓말을 잘해도 목은 대체로 솔직했다.

유전자는 이렇게 쓸데없는 데서 성실했다.

그때부터 나는 이 아이를 혈연으로 인정했다.


밤이 됐다.

불은 다 껐고

마루 불만 켜놨다.

자는데 갑자기 내 방문을 똑똑 두드린다.


"누나 ...누우나 "


사촌 동생은

미역귀의 촉촉한 외로움으로 속삭이듯


"이모가 닭볶음탕 끓여놨어. 냄새가 끝내줘"


끝내준다는 말에

모든 판단 능력이 정지됐다.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나는 왜인지 양말부터 신었다.
몰래 먹는 일에는
예의가 필요하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죄책감은 늘 정숙한 자세를 만든다.


둘이 부엌으로 슬금슬금 갔다.
발바닥이 바닥에 붙어 있는 느낌이었다.


불은 안 켰다.

어둠은 공범에게 관대했다.

엄마는 불 켜는 소리에 유난히 민감했고,

켰다간 등짝이 날아갈 것 같았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의지해

가스 위 냄비 뚜껑을 열었다.

몰래 먹기엔
충분한 조명이었다.


뻘건 닭다리가 자비롭게

우리 쪽을 보고 있었다.


아주 대놓고.



우리는 말이 없었다.

전생에 찰떡궁합처럼.


이번 생에서도 재범이었다.

얼른 손으로 다리 한쪽씩 집었다.

포크를 찾을 만큼 여유 있는 범죄는 아니었다.

이건 생존에 가까웠다.


둘 다 입가는 불타오르고

눈빛은 촛불처럼 반짝였다.

먹다 보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식탁에 냄비채 갖다 놓았다.


은폐는 이미 실패했다.

우리는 공개 범행으로 전환했다.

바닥에 둘러붙은 당근까지 싹싹 먹었다.

증거 인멸은 끝까지 해야 했다.


둘이서 걸신이 파견 나와,

먹방 조회수 올리듯 냄비를 비웠다.


정신 차리고 보니

큰 냄비가 비어 있었다.

현실이 너무 빨리 왔다.



"누나 누우나 어떡하지?"

"몰 모올라 일단 자자!"


아침에 엄마는 압력밥솥에 김을 빼고,

빈 냄비를 들고

방을 부시듯 두들겼다.


"야!!! 너지!! 문 안 열어!!!"


냄비는 말이 없었지만
모든 걸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나는 끝장났고

사촌동생은 마루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 척을 했다.


근데 이불이 들썩거렸다.

이불이 혼자 심폐소생술 중이었다.



숨을 쉬면 안 되는 상황에서

아주 규칙적으로 들썩거렸다.

고장 난 세탁기 탈수 코스 같았다.


잠시 후,

사촌동생이 벌떡 일어나 말했다.


"막내이모,

사실 제가 먹자고 깨워서 따라먹은 거예요."


자수였다. 아침밥을 향한 전략적 잔머리.

자수라기엔 너무 계산이 빨랐다.

독박을 쓰는 모습에 친동생이었으면 했다.


엄마는 잠깐 움찔거리더니 눈이 커지며,


" 근데 그거 덜 익은 거야! 너네 배 안 아프니?"


우린 타고난 위장보다 양심이 먼저 아팠다.


"괜찮아요. 이모 솜씨가 좋아서 맛있었어요."


"그… 그랬니? 두 마리인데.. 한 솥을 다 먹었어?

수학은 항상 범죄 편이 아니었다.


그리고는 웃고 넘겼다.

결국 모든 범죄는 사면됐다.

가족사법부의 최종 판결이었다.

사면은 늘 이렇게 밥 냄새를 타고 왔고,
정의는 잠깐 미뤄졌다.


그러자마자

사촌동생이 배를 문질문질 거리며 물었다.

"이모 아침 안 먹어요?"

"벌배고프다고?"

"이모가 하는 밥 냄새는 끝내줘요"

"호호호 진짜? 알았어 "

누가 보면 신혼부부인 줄..


난 독박쓰는 사촌동생에게 은혜를 갚고 싶었다.

"엄마 나도 배고프다니까 "


우리 집에서는

배고프다는 말이

하이패스 신분증이었다.


엄마는 오빠를 아침밥 먹게 깨우라고 했고,
오빠는 눈도 안 뜬 채
하루치 인상을 미리 다 썼다.


" 불 꺼라~꺼져 꺼지라고!"



발음은 잠결,
눈은 감았는데 짜증만 먼저 일어났다.
자는 건지 버티는 건지 애매한 자세로
세상과의 접속을 단호하게 차단했다.


사람은 가끔 사소한 데서 성격이 튀어나온다.
배고플 때랑 자다 깰 때.


엄마는 나를 잠깐 부엌으로 데려가

팔을 꼬집듯 잡아끌며,


" 쟤한테 하룻밤 더 잘 거냐고 물어보고

잔다고 하면 네가 쟤네 집에 가서 잔다고 해라"


그리고선

몇 개월 치 전기세 밀린 표정으로

도마 위를 북어 패듯 두드리셨다.


엄마의 침묵은 경고였지만
죄보다 배고픔을 먼저 처리했다.





다음 회차는 《그땐 왜 그랬을까 2 》 마지막입니다.
못다 한 이야기는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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