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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ul Apr 25. 2019

할아버지가 나간 산책

시간이 흘러간다.

"이날은 할머니 이사를 도울 거야"



맞아. 할머니가 이사를 한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n 년만이다. 그 넓은 집에 보안도 좋지 않은데 할머니 혼자 지내시니 걱정될 때가 많았는데, 다행히 아는 분들이 많은 곳으로 이사를 가시는 모양이다. 참 오래도 걸렸다. n 년만이다. 집은 철거될까? 그 근처 나에게 익숙한 집들은 조금씩 무너지고 새로 태어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할아버지의 죽음을 실감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자 증거는 그저 내 기억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새로 태어날지라도 그건 내가 아는 집이 아니겠지.


이럴 거면 왜 태어났는지 궁금할 때가 많다. 태어나서 친구를 만나고, 맛있는 커피를 알게 되고, 열심히 한 보람을 알게 되고, 가족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태어나서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나는 못 먹는 비싼 커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노력의 배신을 알고, 가족에게 상처를 받았다. 그 모든 것들은 상쇄되는가? 당신이 살아간 결코 길지 않은 그 몇십 년의 인생에서, 그 모순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할아버지의 자녀들은 내가 수험생이라는 이유로 장례식에는 하루만 있도록 했다. 마치 내가 돌아가면 공부를 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나는 마치 늙었던(그리고 이제 더 늙지 않을) 당신의 죽음과 수능 몇 문제로 인해 달라질지도 모르는 젊은 내 인생이 타인들에 의해 저울질당하고 비교당하는 느낌이었다.


당신의 죽음과 나의 탄생은 비극이었다. 고3이라는 이유로 가족 중 유일하게 장례식을 끝까지 지키지 못한 나는 아직도 당신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당신더러 항상 담배를 끊으라고 잔소리를 하던 둘째 손자는 , 당신이 땅으로 돌아가던 순간은 안 보는 게 나았을 거라고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그리워할 기회를 잃었다. 아직도 나는 당신이 산책을 가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 산책로가 이 세상인지 아니면 다른 곳인지 그 애매한 경계에서 나 혼자 헤매고 있다. 그 증거로, 우울증과 함께 자살 사고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갈 때, 당신 생각을 한 적이 없다. 내가 경험한 죽음 중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는데도 말이다. 나는 아직은 당신이 산책을 마치고 곧 없어질 그 집의 대문을 열고 당신의 뒤에는 nn 년 전에 죽은 그 강아지가 따라 들어올 것만 같다. 강아지인데 이름이 캣스인(cat s) 그 강아지는 항상 머리 먼저 쓰다듬는 나를 위해 목을 빼고 머리를 들이민다. 그리고 그 집은 이제 없어진다.




할아버지, 한 가지 고백하자면 저는 지나온 삶과 지나갈 삶 전부를 없애버리려고 했어요. 상상이나 하셨습니까? 당신이 자랑스러워하던 'A서방'은 당신의 딸과 그의 자식들을 항상 힘으로 굴복시켰고 저는 그게 질려서 모든 것을 없애고 싶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가 자식을 샌드백 취급하지 않음을 당신은 당신의 삶 그 자체로 나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눈 앞의 폭력이 '옳지 않다'는 것을 굳게 믿게 된 건,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이 아닌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질 그 집에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딸이 시집을 갈 때도 울지 않았다던 할머니가 고작 5살이 될까 말까 한 내가 그 집을 떠날 때 흘렸다는 눈물. 그 눈물은 나의 친하지 않던 친구가 우연히 내 비극을 듣고 조용히 흘렸던 눈물과 닮아있어서. 아직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아갈 힘이 없는 나는 그 눈물들을 핑계로 살아갑니다. 나는, 죽으려고 할 때마다 아버지인 당신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당신의 딸이 자식마저 잃게 됨을 상기합니다. 그리고 아마 나의 장례식은 당신의 장례식과 매우 닮아있을 것만 같습니다. 사인은 다르겠지만 우린 매우 닮아있지요.


저는 너무나도 지쳐있습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제 곧 저는 당신이 살아온 인생의 반을 살게 됩니다. 어른이란 무엇일까요?  제가 너무 빨리 삶에 질려버린 걸까요? 누군가의 시처럼, 당신에게 삶은 나쁘지 않은 소풍이었나요?


저는 그저 운이 안 좋아서 소풍을 가는 중 제일 처음 탄 버스가 고장 날 걸까요? 그 고장 난 버스 속에서도 곧 내려서 먹을 엄마가 싸 준 맛난 도시락이나 친구들과 시시덕거리면서 먹을 초콜릿 같은 간식 따위로 아직은 그 소풍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지요? 어쩌면 저는  그것들 덕에 그 소풍이 썩 나쁘지 않았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게 될까요? 그 첫 번째 버스의 운전기사 중 하나였던 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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