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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ul Oct 16. 2019

사는 게 뭐라고.

"참 허무하다 그렇지?"

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해라).

그냥 별생각 없이 mori 대신 caelo(하늘)을 썼을 뿐이다. 정말로 별생각 없이. 폰케이스에 넣을 그림이라서 그냥저냥 있어 보이지만 심각하진 않은 문구를 생각했을 뿐이다. 하늘을 기억해라. 죽음을 기억해라. 현실을 기억해라. 

난 분명 졸업시즌에 마가 낀 게 분명하다.

이번 주는 바쁘다, 바빠야 했다. 다음 주에 시험이 3개가 있고, 면접이 있는 데다가 졸업 프로젝트와 취업 준비를 하느라 시험공부는 전혀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너무 지쳐있었고, 그런데도 계속 옆에서는 달려가라고 했고, 상담 선생님마저 시간을 잘 써야 한다며, 계획을 꼼꼼히 세워야 한다고 했다. 지친 나를 알아주는 사람들도 나를 격려했다. 지금은 달려야 한다고. 그래, 그렇지. 그런데 달리다가 고꾸라져서 다시 못 일어날 것 같아. 그러면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그럴수록 시간을 잘게 쪼개서 잘 써야지, 계획을 잘 세워야지.

일어나자마자 알람보다 먼저 울린 건 엄마로부터의 전화였다.

할아버지가 위독하대. 엄마랑 아빠는 어제부터 병원에 있었어.

그래? 그럼 내가 000(동생 이름) 한태 물어보고 같이 갈 수 있으면 갈게. 한번 비어있는 기차를 볼게.

괜찮겠어? 

엄마 우리 이제 곧 역이야. 한 5분 남은 듯?

그래? 그러면 00 대학교.... 장례식장으로 와.  

아하 00대 병원, 장례식장?

응...


난 졸업학년에 마가 낀 게 분명하다, 두 번 말했습니다.

고3 때, 외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대학교 4학년에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친할아버지는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복잡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 아버지는 평소에는 평범하다가 갑자기 돌변해서 나나 동생을 때려왔고, 그건 엄연한 학대이기에. 그렇기에 나는 할아버지도 아버지에게 같은 아버지였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참, 허무하다 그렇지?

아직 손님이 오지 않아 한산한 장례식장 안에서 숙모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게요. 집안의 성인 중 유일하게 나만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입관도 보지 못 했다. 멀리서 혼자 온 사촌동생을 마중하고 장례식장 입구로 들어온 순간, 입관을 끝내고 터덜터덜 나오는 친척 어른들, 부모님과 눈을 마주쳤다.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는 나는 그저 중학생 동생의 어깨를 이끌며 먼저 올라갔다. 뒤에서 들려오는 흐느낌에도 돌아보지 않았다. 내가 머뭇거리면 옆의 중학생도 머뭇거릴 것이 뻔하므로. 사촌동생들은 그랬다. 어렸을 때부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심각성은 가장 나이가 많은 내 반응을 보면서 알아챘다. 내가 겁먹으면 울었고, 내가 덤덤하면 울려다가도 멈췄다. 

언니 내가 가야 할까? 나 할 일도 많고....

수업도 많은데.... 언니는 모르겠지만, 난 상황이 정신이 없단 말이야"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이런 말이나 하는 어리지 않은 사촌동생도 있었다. 어째선지 짜증이 났다. 피곤했다.

나한테 왜 허락을 받아? 왜 나한테 핑계를 대? 너 나한테 뭐 잘못했어? 네가 진짜 상황 때문에 못 오더라도 너는 장례식에 진심으로 오고 싶어야 해. 할아버지 돌아가셨잖아. 그리고 네 상황이 뭐 그걸 왜 나한테 설득해. 상황으로 날 설득하려고 하지 마. 난 내려오면서 이력서 서류 썼거든? 네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그걸 가족 한태 말하면 안 되지. 너는 나중에 할머니나 다른 어른들이랑 전화할 때, 말조심해. 

그래서인지 사촌동생은 그렇게 장례식 며칠 동안 그 누구에게도 전화를 걸지 않았다. 



나는 왜 화를 냈을까? 나도 그 아이와 똑같은 생각을 했는데. 할 일이 많은데, 어쩌지... 하고. 내가 뭐가 잘났다고 이런 말을 했단 말인가. 가족 중 유일하게 울지 않는 내가 이질적인 존재 같았다. 다들 끼여서 자는 데 혼자 노트북을 켜서 무언가를 작성하는 내가 너무 이질적이었다. 겨우 작성을 하고 제출을 하자 몇 시간 뒤에 연락이 온다. 마감이 늦춰졌단다. 이쯤 되면 세상에 미움받고 있는데 내가 너무 눈치 없이 살아있는 게 아닌가 싶다. 고작 마감 늦춰진 메일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심지어 장례식장에서 하고 있는 내가 또 이질적인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현실은 현실이지.


이번에도 발인을 보지 못 하고 나왔다. 고3 때는 고3이니까 얼른 가야 한다면서 어른들이 데려다주었다. 공부도 못 하고, 그저 빈 집에서 며칠을 혼자 있던 것이 이상한 기억으로 남아있어서, 이번에는 죽어라고 발인까지는 꼭 보자고 마음먹었지만, 이번에도 혼자 가야 했다.  혼자 올라가는 길 내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입관도 못 봤고 발인도 못 봤어. 나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실감할 모든 기회를 놓쳤다. 서울역에 도착해서 많은 사람들 사이에 끼여서 멍하니 있으면 폰에서 알림이 울린다. 다음 주 시험인 수업들의 안내 공지, 서류 마감이 임박했다는 채용 공고, 리포트에 수정이 필요하다는 메일, 조별 모임 시간을 알려주는 메시지들. 바쁠 때는 성가시게 느껴질 정도로 울렸던 친구들의 만남 독촉 카톡은 전혀 울리지 않는다. 울리는 알람들은 전부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라는 메시지들.


현실에 돌아오라니. 나는 내 현실을 겨우겨우 살아내가고 있었는데 왜 여기서 계속 더 하라는 거야? 그 무엇도 내 현실이 아닌 게 없는데. 왜 계속 더 정신 차리라는 거야. 내 잘못으로 된 것도 없는데. 세상은 앞서가거나, 뒤쳐지는 결과밖에 없는 걸까? 그냥 상황이 꼬일 뿐인데. 

밥 든든히 먹어, 올라가는데 4시간 걸린다면서?

요 며칠, 제대로 된 밥상이 너무 그리웠는데 그걸 장례식장에서 할아버지 영정사진을 보면서 먹을 줄이야. 그런데 맛있긴 정말 맛있더라. 장손인데도 여자라서 상주는 못 하고 이상한 치마 한복을 입었을 때, 다시 기분이 상했는데, 밥이 맛있긴 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할아버지가 준비해 준 밥상이었다. 할아버지, 당신은 어떤 아버지였나요. 우리 서로 있을 때 잘했어야했는데 말이죠. 


0월 00일, 0월 00일 잊지 않을 거야. 오늘은 0월 00일이야.

장례식장에서 잠깐 밖으로 나와서 군것질거리를 쥐어주는 나에게 막내 사촌동생이 얘기했다. 맞아. 오늘은 0월 00일. "그래, 나도 기억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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