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ul Mar 14. 2020

시계 없는 나날들.

갖고 있는 모든 시계가 고장 난 지 한 달.

나는 어떤 순간은 인생이 주는 메시지라고 생각하는, '연금술사'에 나올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나는 몸이 좀 아파도 적당히 약을 먹으면서 해야 할 일을 계속하는데, 정말 손가락도 못 쓸 정도로 아파서 쓰러진다. 그러면 내가 너무 쉬지 않아서 "이렇게라도 해야 겨우 쉬겠군!"하고 생각하는 인생의 메시지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한 달 전에 내가 가진 모든 시계가 고장 났다.


탁상시계대신 내 책상에 올려져있는 친구. 시계를 보는 대신 가끔 분위기 환기시킨다고 돌려준다. 꽃잎이 내린다. 샤랄랄라라라라. 따라라라라라라랔라

나는 시계를 정말 좋아한다. 

시간에도 엄청 철저하다. 시간을 좋아해서 시계를 좋아하게 된 건지, 반대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건 난 시계를 정말 좋아한다. 어느 정도냐면, 용돈을 받으면 모아서 무조건 손목시계를 샀고, 책상에는 탁상시계 책상 뒤의 책장에는 용돈을 모아서 산 예쁜 모양의 시계(모양의 톱니바퀴들) 정확히는 톱니바퀴를 좋아한다. 오르골, 시계 이런 거 말이다. 톱니바퀴가 좋아서 기계과에 왔고 졸업 프로젝트에서 팀에서 gear generation부분을 맡기도 했다.(이건 좋아서 맡은 건 아니었다.)


용돈을 모아서 산, 장식품에 가까운 시계. 탁상시계와 함께 항상 올려져있던 시계다. 책상에 시계가 두개였다.

손목시계가 싼 것이든 조금 비싼 것이든 여러 개였기 때문에, 손목시계 중 하나가 약이 떨어져도 얼마든지 다른 것으로 갈아 끼웠고 그동안 약을 충전했다. 그런데, 이번에 마지막 시계까지 다 고장이 하루 이틀 간격으로 났다.


이거 이거,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편하게 살아가라는 신의 계시?


1분 1초가 급했던 학기가 아니라, 학기가 끝난 후에 고장이 났고 나는 제주도 여행을 앞두고 있었다.  타이밍 참 좋다. 굳이 바쁘게 살지 않아도 되는 타이밍. 시계가 고장 난 와중에 타이밍을 논하는 건 좀 그런가? 여하튼,

가뜩이나 불안한 혼자 가는 여행, 나는 손목시계를 두고 갔다. 시간에 구애받는 건 어플을 보면서 버스가 언제 오는지 예측할 때, 그때뿐이었다. 


비싼 시계들은 아니지만 어디 지하상가 갈 때마다 하나씩 사온 시계들. 다 고장났다.

시간은 무조건 아날로그적인 시곗바늘로 보는 게 습관이라서 나에게 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는 습관은 없었다.

 그래서 완전 감으로 살았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뭔가 다이내믹한 변화가 생겼냐, 아니다. 그냥 시간에 쫓기지 않게 되었다. 놓칠까 봐 전전긍긍해하지 않고, 놓치고 나서 알았다. 

지금까지 시침과 초침이 나눠주었던 시간은 나누기 나름이었다. 시간은 물이나 공기 같은 개념임을 알았다. 그냥 필요한 사람이 뭉덩뭉덩 자신만의 단위를 넣어서 사용해온 것이다. 지금 내가 시간을 가늠하는 순간은 새벽에 눈을 떴을 때 방이 보라색이면 6시쯤 됐겠군, 뿐이다. 

왼쪽 손목에 시간을 알려주는 기계가 없는 것이 가끔은 신기하다. 첫 손목시계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으니, 거의 15년 동안 나의 왼손에는 시계가 있었다. 이쯤 되면 왼손에만 붙어있는 새로운 근육이라거나, 여섯 번째 손가락이라거나…. 그렇게 표현해도 무방할 정도다. 이렇게나 떼기 쉬운 부위였다니. 

첫 알바비로 바로 산 스와치 시계. 내 꿈의 기업이다. 언젠가 스와치에서 일하고 싶다 흑흑.

하지만 확실히 계획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다. 지금 코로나 사태에, 나는 졸업했고 취업은 못 해서 붕 떠버리고 집에만 있는 상황이라서 가능하다. 지금은 주말도 평일도 비슷하게 보내서 날짜, 세월에 대한 감각까지 애매하다.

그러나 금방 또 왼쪽 손목을 5분에 한 번꼴로 보면서 머리를 정리하고 밖에 뛰어다닐 날이 오겠지. 그때까지만 조금 더 맹하게 살아보기로 했다. 이렇게 사는 건 처음이니까, 이런 삶도 이런 순간도 겪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매거진의 이전글 반성하지만 후회하진 않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