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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ul Mar 21. 2020

카페에서 덩그러니.

욱여넣지도 않고 토해내지도 않는 시간이 필요하다.

제주도에서 찍은 사진 중 가장 맘에 드는 사진. 노트북도 없고 시계도 없이 바다를 보면서 넘실거렸다.  저 커피의 저 압도적인 거품이 신기하지 않으십니까. 저도 그랬습니다.

스케쥴러를 보니,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비행기 모드로 2시간 있어라'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요즘 스마트폰을 너무 많이 봐서, 잠도 잘 못 자는 경지까지 이르렀다. 할 일을 위해 비행기 모드로 해 놓고 알람을 40분 설정해놓았다. 40분 할 일 20분 쉬기. 40분은 금방 갔다. 그런데 20분 동안 쉬려는데 아무것도 못 하겠다! 비행기 모드라서 인터넷을 할 수 없으니 할 게 없었다. 휴대폰 화면으로 1분씩 보다가 정확히 16분이 지나고 다시 시작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너무 좋아하는 사진이라서 이걸 그려보고자 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욱여넣거나 토해내거나 둘 중 하나만 하는 사람이 되었지?

충동적으로 카페에 왔다. 원래는 그냥 산책만 하려고 지갑만 들고 나왔다. 폰 배터리도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할 것 그 무엇도 없었다. 

날씨가 좋아서 노래도 듣지 않고 근처를 돌다가, 갑자기 맛있고 시원한 아메리카노가 마시고 싶었다. 할 것이 없어서 카페 가서 뭐하나, 테이크 아웃해서 집에 갈까.

그래 할 일 없으면 어때 그냥 커피맛만 오로지 즐기면서 멍 때리고 오는 거지. 생각 정리할 필요 없고 그냥 진짜 토해내지도 욱여넣지도 않는 시간. 인풋 아웃풋이 없는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채색 중이다. 케이크는 당근케이크였는데 채색하다 보니 체리? 딸기? 약간 그런 느낌으로 바뀌었다.

예전에는 ktx의 3시간이 노래만 듣고도 잘만 흘러갔는데. 이젠 유튜브까지 보는데 1시간도 버티기가 힘들다. 잠이 안 오면 무조건 폰을 꺼내서 뭐라도 확인하고 잠이 깬다. 나는 언제부터 알람의 노예가 되었을까.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카페 사장님과 간단한 얘기를 나눈 뒤, 조용히 앉았다. 아무것도 꺼내지 않고 그저 카페만 멍하니 마시다가 가끔 휴대폰 화면을 보는 나는 이질적이었다. 다들 일행과 얘기하거나, 노트북을 꺼내거나 공책 혹은 읽을 책을 꺼내어서 열심히 하고 있다. 정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구름을 그려보자. 몽실몽실한 구름을 그리고 싶다. 

다른 것도 아니고 아메리카노를 시킨 것은 정말 내가 각오한 일이었다. 정말로, 쓸데없이 시간을 흘러 보내기 위한 메뉴였다. 집에서 커피를 타 먹는 나에게 아메리카노는 언제부터인가 밖에서 몇천 원으로 시키기 아까운 메뉴가 되었다. 테이크아웃을 해서 마셨으면 마셨지, 카페에 있을 경우에는 차라리 음료값을 하는 카페모카나 시그니쳐 메뉴를 시켰다. 그러나 오늘은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었다. 공부도, 읽을 책도, 할 일도 없이 말이다. 휴대폰 배터리는 40프로 정도 남아있었다.  애매하지만 딱히 뭘 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오래 있을 것도 아니니까 상관없다. 

오랜만이다. 카페에서 오로지 커피만 마시는 것이 낯설다. 커피만 다 마시면 나갈 거라는 계획도 오랜만이다.

배색이 매우 맘에 든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나는 깔끔히 마무리하지 못할 것이다.


멍 때리다 보니 주변 사람들 얘기가 들린다.
“이거 이렇게 하면 소리는 안 들리는 거야?”
“그렇지”
아버지께 폰의 사용방법을 알려주는 아들. 나도 가끔 폰 기능으로 헤맬 때가 있다.


“아니, 여행 취소비가 얼마라니까.”
“그니까 그렇다고 다음에 언제를 기약해야 하는 거야”
나는 운이 좋게 코로나 터지기 한 달 전, 제주도를 다녀왔다.


“이번에 그 기업 수시채용으로 전환했다니까.”
.... 이제 집에 가야겠다. 나의 현실을 깨닫는다.

지층 같은 구름과 반짝이 별들 완성.


오늘은 날씨도 좋았다. 이번엔 집에 가서 유용한 강의나 라디오를 듣지 않고, 그렇다고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지도 않고, 그냥 덩그러니 누워서 졸 예정이다.
갑작스러운 졸업과 코로나의 캄보로 할 일이 없어졌다. 시간을 보내주는 건 익숙지 않다. 그 시간을 인터넷 없이 보내는 것도 익숙지 않다. 딱히 뭔가를 하지 않는 시간도 익숙지 않다. 

항상 할 일을 하고  또 시간 꺼내어서 글 쓰고 그림 그리고 또 할 일을 했는데. 하긴 결국 나도 한국인이니까. 뭔가를 해야 하는 강박 때문에 달고나 커피를 휘젓고 머랭을 치는 흔한 한국인이니까, 가만히 있는 건 연습이 필요하다.


덩그러니 있는 연습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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