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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ul Mar 25. 2020

왜, 라는 단어

아주아주 개인적인 '왜' 사용법

예전 그림이지만 요즘 그린 게 없어서 올린다. 타로의 The world를 그려보자.

나에게 왜(why)라는 단어는 이런 느낌이다.

1. 원인을 파악하고 분석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의문의 시작.
2. 탓하고, 뒤돌아보고, 미련을 가지며 자꾸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과거에만 남아있게 만드는 자학의 시작.
3. 시작도 안 했는데 끝나버렸다는 동방신기 노래 (keep your head down).

그래서 나는 '왜'라는 단어는 모든 경계선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자아 성찰과 자기비판의 사이에 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순간과 평생 과거에만 남기를 선택하는 순간의 사이에 있다. 왜, 라는 질문을 던진 순간 사람은 이 대비되는 순간에서 무언가를 괴롭게 선택해야 한다. 좋은 일에 의미를 찾기보다는 안 좋은 일에 의미를 찾기가 쉬우니까. 보통은 그 순간에서 '내가 왜 그랬지'로 흘러가곤 한다.

마치 보이지 않는 미세한 경사가 있는 길처럼. 그만큼 위험하고도 굉장한 힘을 가진 단어다. 함부로 꺼내기 어려운 단어이다.


나의 '왜' 사용법은 이렇다.

건물을 꼼꼼히 그리는 건 참 힘든 일이다.


1. 눈 앞의 사람에게는 쓰지 않는다.

1을 아주 깊게 깨닫게 된 일이 있다. 나의 남동생은 현재 군대에 갔는데, 하필 좋지 않은 곳으로 배정받았다. 그래서 남동생이 엄마한테 슬퍼하면서 전화를 걸었는데, 그때 엄마의 말이 이랬다.

"왜 하필...그렇게 되었을까?"

물론 속상하셔서 한탄하듯이 하는 말이다. 하지만 본인이 가장 억울하지 않을까? 내 동생이라고 그러고 싶었겠는가? 속상한 마음은 알겠지만 저런 말을 들으면 내 탓을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엄마의 잘못도, 동생의 잘못도 아닌데 참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이런 경우엔 나도 쓴다.

친구: 이번에 상사가 이렇게 이렇게 해서 나한테 무안 줬어... 그분 때문에 너무 힘들다...
나: 아니! 그 사람은 왜 그러는 거야? 저번에도 그러더니! 진짜 이상하고 못된 사람이다!
허접하지만 채워보았습니다.

2. 원인이 나한테 없는 경우에 쓰지 않는다.

이 경우에 쓰면 자학밖에 안 된다. "나는 왜 한국에 태어나서,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왜 나는 백수고 취업을 못 했는가...." 모든 일들은 원인이 나일 경우도 있지만, 이런 일들은 보통 내가 거스를 수 없는 뭔가 큰 흐름이거나 타인일 경우가 많다. 잘 안되지만 열심히 "나는 한국에 태어나서 힘들다! 이런 일 겪고 싶지 않았고 너무 아프다! 사실 돈만 많으면 백수 하고 싶다"! 이렇게 바꿔서 말하려고 노력 중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달 안에 해가 있는 건데 느껴지시나요 화자의 의도가...? 흑흑.

3. 원인이 나의 너무 내부에 있을 때, 쓰지 않는다.

자기 분석을 멈춘다. 나의 편이 된다.

자기 자신을 잘 알아야 한다는 말과 자기 자신을 너무 잘 알면 힘들다는 말도 있다. 정말 한 끗 차이다.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으면 더 이상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원인을 알아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문제들은 대개 그 원인도 정확하다. 자소서를 못 썼다던가, 날씨에 맞지 않는 옷을 입었다던가, 공부를 열심히 안 했다던가. 그러면 자소서 첨삭을 받고, 날씨를 항상 체크하고 나가고, 공부하는 시간을 늘리면 된다. (그렇다고 잘 된다거나 해결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방향이 정해진다는 얘기다.) 하지만 분석이 자학이 되는 경우에는 멈춘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서' 일어난 일에는 멈춘다. 정말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취업 컨설팅에서, 선생님께 이런 얘기를 들었다.


면접은 말이지, 붙은 사람도 안 붙은 사람도 왜 그런지 몰라. 인사과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면 왜 그 사람을 뽑았는지 기억 안 날 걸? 그러니까, 이미 지나간 면접의 원인을, 그때 면접관도 아닌 우리끼리 아무리 '정확한 원인을' 분석해봤자 쓸모가 없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설정할 정도만 예상하고 반성하는 거야.

세상에 면접 같은 일이 한두 개가 아니다. 나도 원인을 모르고 그 원인이 나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고, 타인에게도, 시간에게도, 공간에게도 있는 아주 복합한 문제가 많다. 여기서 '내가 그때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내가 이런 면이 있어서, 그게 그렇게 발휘해서 안 좋은 결과가 나온 게 아닐까?' 하면서 나를 조각조각 따따따 쪼개 보았자 박살난 나만 남을 뿐이다.

하지만 내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나를 보듬어주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걸 위해 '왜'를 멈춰야 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건 지금이다.


++팁.

나는 왜라는 생각을 멈추기가 힘들 때는 그냥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단 것을 입에 넣고 씹는 것에만 집중한다. 혹은 맛있는 커피를 마신다.

냥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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