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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ul Apr 03. 2020

나한테 필요한 건 위로였음을.

세상은 울퉁불퉁합니다. 그러니 여기 내 손을 잡아요.

Ktx안에서 멍하니 있었다. 3시간이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웬일로 멍만 때리고 있다. 봄이라서 그런지, 꽃이 엄청나게 펴 있다. 이 길, 한 달에 한두 번은 꼭 지나치는 이 길이 이렇게나 아름다웠던가? 마치 빠른 기차를 타고 꽃터널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영화처럼 이 터널을 지나고 나서 새로운 세상이 올 것 같다. 그래, 새로운 세상이긴 하지. 몇 주간 집에서 쉬다가 다시 서울로 가고 있다. 취업 준비를 위해서다. 많은 고민을 하고 결정한 후에도 많이 주저했다. 그냥 집에서 할 걸, 괜히 돈만 많이 들고… 이렇게 해서 안되면 어떻게 하지? 게다가 이번엔 월세를 줄이기 위해 셰어하우스로 들어간다. 몇 년간 혼자 살아온 내가 남들, 그것도 생판 남들과 살 수 있을까?

논길을 따라 사람들이 걷는 게 보인다. 일을 한 후에 귀가하는 것일까. 기지개를 켜고 있다. 조금 오래 켜고 있다… 기지개를 양옆으로 손을 흔들며 켜고 있다. 아니, 아니다. 이건 기차에게 인사하는 거다! 항상 이 길을 지나가는 기차를 향해 항상 손을 흔들었을 것 같다. 그런 느낌이 왔다. 한두 번 하는 게 아닌 것 같다. 나는 재빨리, 누군가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만큼, 그러나 그 사람에게 닿을 만큼 손을 흔들었다.

항상 기차가 지나갈 때 기차를 향해 손을 흔들던 소녀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 소녀는 항상 손을 흔들었지만 누구도 맞인사를 해 주지 않아서 섭섭해했다. 다음 날도 여전히 소녀는 손을 흔들었고, 누군가가 손을 흔들었다. 그 누군가는 기차가 멀어져서 보이지 않을 않을 때, 창밖으로 손수건까지 흔들면서 인사를 해 주었다. 물론 나는 ktx니까 그렇게 하진 못했다. (했다면 잡혀갔겠지.)

매일 아침, 기꺼이 초심자가 되어라.

익숙하지 않은 잠자리, 익숙하지 않은 룸메의 존재로 잠을 설쳤다. 미리 알아본 북카페의 영업시간이 될 때까지 거실에서 멍하니 있었다. 밥을 먹고, 밖을 나섰다. 다행히, 이 거리는 내가 몇 년동몇 살아온 거리다. 집과 사는 사람만 바뀐 것이다. 그러나 이 거리도 몇 년 새 많이 바뀌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카페에 찾아가는 꿈을 꿨다. 그 카페는 작년에 영업 종료했다. 그 카페 주변에 다른 카페를 찾아갔다. 그 거리라도 걷고 싶어서.

그런데 웬일인가. 영업을 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모르겠다. 느낌 상, 무슨 모임이 있어서 신청자들만 안에서 말할 수 있는 것 같았다. 확실치는 않다. 안으로 들어가 보면 되잖아? 그러나 나는 어깨를 축 떨어트리고 나왔다.


살던 곳에서 쫓겨 나온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전부 낯설었으면 모르겠는데, 낯설지 않다. 밖은 안 낯설고 안은 낯설다. 이제는 개강도 아니고 언제 어떻게 끝날지 모르는 무언가를 계속해야 하는데, 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집에는 최대한 늦게 들어가고 싶다. 그러다가 문득, 예전에 갔던 다른 북카페가 생각났다.

알아내야 할 일이란 없다.

그곳은 내 기억보다 훨씬 따듯했으며, 아이스라테는 내가 찾던 아이스라테 그 자체였고 점원분의 까르르 소리는 나를 즐겁게 했다. 동네 주민들이 커피를 사러 왔다 갔다 하는데, 우연히 들은 대화로는 정말 친해 보였다.

잠깐 채용 공고를 찾아보니, 예상대로 이제부터 쏟아지고 있었다. 원래보다 한 달 넘게 미뤄졌지만 결국 나오긴 하겠지. 미리 각오하고 있길 잘했다. 내일부터 할 일들이 많다. 해야 할 일들이 명확해지자 마음이 편해졌다. 오늘 장을 보느라 돈을 많이 썼지만, 내일부터 힘내란 의미로 오늘 맛있는 것을 사 먹자. 마침 여기 근처 돈가스집이 있다.

인생은 울퉁불퉁합니다. 그러니 여기, 내 손을 잡아요.

돈가스집은 문을 안 열어주었다.

네이버에도, 자기들 문 앞에서 5시부터 연다고 해놓고는 30분 기다리란다. 그냥 나왔다. 대체 뭐야. 또다시 익숙한 곳에서 쫓겨난 기분을 느꼈다. 아, 진짜 싫다.

아, 파니니 집이 있지!  파니니 집에 들어가자, 손님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편하게 있다가 파드득 일어나시는 점원분이 있다. 파니니를 주문하고 앉았다. 기분은 계속 안 좋았으나 점점 진해지는 맛있는 냄새에 기분이 풀렸다.

파니니는 예쁘게 담겨 있었다. 이제 물을 뜨러 가려는데, 점원분께서 찬 물을 드릴까요? 라면서 따라주신다.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세요.

물을 마신 순간. 깨달았다.

아 나에게 필요한 건 위로였다.

종종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것은 문제에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일 때가 있다. 조금만 초점을 뒤로 물려라. 초점을 많이 뒤로 물려서 큰 그림을 보아라.

뭐가 괜찮나. 낯설지 않은 곳이라고 해도 친하지 않은(그리고 그들끼린  이미 친한) 사람들과 갑자기 같이 살아야 한다. 거의 10년 동안 잠을 혼자 잤는데 이젠 이 층 침대에서 조심조심하면서 자야 한다. 이젠 누군가가 무언가를 도와주지도 않고, 정해주지도 않는다. 난 무언가를 온 힘을 다해서 얻어야 하고, 그 시간이 지체될수록 나의 입지가 위험해진다. 이런 상황인데 뭐가 괜찮아, 하나도 안 괜찮다. 그러니까 안정과 위로가 필요하다.

파니니는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오랜만에 무언가를 보지 않으면서 그 음식에만 빠져서 먹었다.


차가운 계절은 지나고 봄이 또 찾아왔죠. 이렇게 시린 겨울을 우린 잘 버텨냈네요.

 다 먹을 때쯤 가게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온다. 머쓱한 듯이, 자기는 커피 원두를 파는 사람인데, 원두를 어떻게 하시냐고 물어본다.

 아, 저희는 00에서 하고 있어서요, 맛이라도 한번 봐주시면 어때요…? 감사한데, 죄송해서 그렇죠… 아…. 그러면 나중에 원두 맛보기로 하나 만들어서 드릴게요. 네 수고 많으세요.

나와 전화를 하다가 단골손님을 부르던 엄마가 떠올랐다. 바로 옆에 같은 가게가 생겨버려서 안절부절못함이 잘 드러났다. 장사란 그런 것이다. 많이 뛰어야 한다. 그렇기에 장사하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나도 살아야 한다. 그들이 그들의 일을 묵묵히, 안절부절못하면서 하듯, 나도 묵묵히 안절부절못하면서 내 일을 해야 한다. 아직 일은 없지만. 내가 할 일을 해야 한다. 집에 가서 글을 쓰고, 집 안에 들어가기 전에 심호흡을 한다. 몸에 힘을 빼면서 내가 할 일에 집중한다. 

언젠가 이 집도 나에게 위로가 되겠지. 지금은 ‘아직’ 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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