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ul May 03. 2020

나는 실패로부터 시작한다.

모든 한걸음은 실패에서부터.

자소서 연속 탈락 기념으로 만든 딸기 요구르트 어쩌고




나는 실패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시작과 실패 사이에 그 어떤 연결고리도 없었다.  졸업 프로젝트 적응 실패로 홈카페용 시럽들과 모카포트를 샀다. 늦게까지 공부하는 것을 실패해서 아침 달리기를 시작했다.  A를 실패했다고 A’를 시작하진 않았다. 그랬다면 실패와 시작이 아닌 ‘극복’이란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시작과 관련된 글인데 시작부터 실패만 노래해서 민망하지만, 나는 정말 그렇다. 희망차고 반짝이는 20대 청춘 같은 시작? 나에겐 없었다. 나에게 시작이란 무언가를 실패하고 나서 전혀 상관없는 것을 갑자기 시작하는, 화이트홀과 블랙홀 같은 존재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찾은 네 잎 클로버. 아주 쉽게 찾았지만 그 이후로는 찾을 수 없었다.

나는 현재 내 주변 인간관계에 굉장히 만족하고 있는데, 이것 또한 가장 친하고 유일했던 친구와의 관계가 실패했기에 시작되었다. 당시 나는 한 친구에게만 집착했고 그 친구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대학 입학과 동시에 나를 포함한 자신의 모든 관계에게서 잠수를 탔다. 유일했던 관계의 실패는 다양한 관계의 시작을 알렸다. 나는 운이 좋게도 내가 몰랐을 뿐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은, 인복이 좋은 사람이었다. 한 명만 바라보던 시선이 없어지고 주위를 둘러보게 되자 알 수 있었다. 내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다는 것을. 나는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그건 새로운 일상의 시작이었다.

넌 날 구원하러 온 파괴자였어. 정말 고마워, 나에게서 도망쳐줘서 나의 좁은 관계를 부숴줘서. 나의 새로운 관계를 시작시켜줘서. 난 잘 지내는데 너도 주변에 좋은 사람들 많았으면 좋겠다.

버스 기다리면서 한컷.

브런치도 실패를 해서 시작했다. 브런치의 시작은 우울증과의 전쟁에서 완벽한 패배와 대학생활 적응의 퍼펙트한 실패의 콜라보였다. 당시 나는 바쁘게 살면 괜찮다는 조언에 따라 전공이 들어간 2학년임에도 불구하고 무리해서 알바를 잡았다가 멋대로 그만두었다. 당시 살던 곳 바로 앞에는 큰 사거리가 있었는데, 그 횡단보도에서는 어느 타이밍에 뛰어들어야 깔끔하게 죽을 수 있을지 타이밍을 쟀다. 정상적인 삶의 완벽한 실패다. 그리고 브런치의 시작이었다. 어떤 마음으로 시작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글쓰기는 그림으로만 이야기를 하는데 실패해서 시작했다. 브런치 초기에는 그림만 그렸다. 만화나 간단한 그림만 올리려고 했다. 그러나 은근 그림만으로 이야기를 전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다 보니 글도 쓰게 되었다. 몇 년 전만 해도 글은 나와 가장 먼 존재였다. 그런 내가 이제 카페에서 노트북을 두들기면서 서평을 쓰고 에세이도 기고하는 사람이 될 줄이야. 

재미있게도 실패로부터 시작한 시작은 또 다른 시작을 낳는다. 글쓰기 위해서 간 카페 때문에 카페를 탐방하는 취미가 생겼고 커피에 관심을 가지면서 커피를 직접 집에서 만들어마시기도 했다. 삶의 실패가 취미의 시작이 되었다.

지금 나는 졸업 전 취업이 실패하면서 셰어하우스에서 룸메들과 살면서 라디오를 듣기 시작했다. 다양한 라디오를 들으면서, 예전에 관심이 없었던 사회문제까지 여러 의견을 갖고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나에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까지는 아니지만, 시작의 이유이다.  지금의 나는 많은 실패와 그로 인한 시작으로 이루어져 있다. 무언가를 실패할 때마다 내심 기대한다. 나는 또 이걸 핑계로 뭘 시작하고 있을까? 무슨 일을 벌이고 있을까? 지금부터 무엇을 저질러볼까. 

매거진의 이전글 다이어리를 빼앗겼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