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어지는 도시를 좋아한다.
늘어지는 시간이 어색하지 않은 도시를 사랑한다. 늦게 오는 친구를 커피 한 잔 시켜놓고 20분 정도는 기다려도 괜찮은, 나쁘지 않은 그런 시간을 주는 도시를 사랑한다. 에스컬레이터에서 왼쪽에 섰다고 뒤에서 뛰어 내려가거나 올라가려는 사람들 때문에 비켜도 되지 않는 시간을 사랑한다.
맘에 드는 하늘이나 소품, 장면을 발견하고 그 순간 걸음을 멈춰서 사진을 찍어도 되는 도시를 사랑한다. 뒤에서 누가 오는지 신경 쓰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핫스폿에서 사진을 찍느라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찍느라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사랑한다.
"같이 가! 언제 발걸음이 이렇게 빨라졌냐."
나는 서울에만 오면, 특히 내 대학 근처에서 걸으면 무조건 빨리 걷는다. 그리고 앞에서 천천히 걷는 사람은 무조건 앞서간다.
처음에 서울에 왔을 때는 놀랐다. 다들 뭐가 그리 바쁜가. 에스컬레이터에서는 왜 달리는가, 다음 신호를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왜 이리 많은가. 카페에만 오면 드럼 두들기듯 노트북을 왜 그렇게나 두들기는가. 커피 한 모금도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왜 이리 바빠야 하는가? 이 의문은 어느샌가 앞사람은 왜 이리 늦게 걷는가?로 바뀌었다. 나도 바빠졌다. 그래서 이 도시를 싫어했다.
나는 내가 이 도시를 싫어하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바쁜 도시가 싫은 거였다.
느긋하게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가 있는 이 도시를 사랑한다.
이 카페에서는 여기서는 절대로 공부라던가 이력서라던가 그런 아주 생산적인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나만을 위해 멍하니 커피만 마시는 그런 사랑스러운 시간을 가진다. 그렇게 하기로 정했다. 노트북을 드럼처럼 두드리며 인상을 쓰는 순간은 잠시 접어두고, 노트북을 보는 척 하면서 멍하니 있는다.
낮의 하늘도, 밤의 하늘도, 노을이 지는 하늘도 아름다운 이 도시를 사랑한다.
언제든지 걷다가 다 같이 홀린 듯이 달을 바라보기 위해 발걸음을 멈출 수 있음에 감사한다. 멍하니 벤치에 앉아서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순간을 즐기다 보면, 해왔던 모든 고민들이 객관적으로 보인다. 그래 봤자 고민을 안 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조용한 활력이 넘치도록 흐르는 이 도시를 사랑한다.
요즘 밤에 딱 걷기 좋은 때이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분다. 다행이다. 낮에는 너무 덥기 때문에. 해는 졌지만 여전히 도시에는 활력이 넘친다. 가로등들이 켜지기 시작하고, 퇴근한 사람들은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고양이들도 나오기 시작한다.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듣기 좋다. 물론, 마스크는 필수로 해야 합니다. 라디오를 들으면서 걷다가 벤치에 앉아서 활력이 넘치는 건물과 가게들을 바라본다. 코로나만 아니면 커피를 테이크 아웃해서 마시는 건데, 아쉽다.
재미있는 순간이 많은 도시를 사랑한다.
‘힙’스러운 도시 근처에 살고 있다. 이름값을 하기 때문인지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구석이나 가게가 많다. 가끔 눈길을 끄는 건, 자연스럽게 형성된 그 가게만의 외관. 내가 자주 걷는 거리는 사람이 많은 거리는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지 걷다가 멈춰서 사진을 찍거나 감탄을 할 수 있다. 서울에 사는데 사진을 찍기 위해 부담 없이 걸음을 멈출 수 있다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엄청난 행운이다.
이 도시는 사랑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도시 안의 늘어지는 도시는 사랑할 수밖에 없다.
다들 바쁘게 살고, 살아가야만 살아남는 이 상황에 늘어지는 건 엄청난 용기와 기백을 요한다. 그게 가능하도록 하는 도시의 늘어지는 순간을, 그런 그 도시를 사랑한다. 이건 처한 환경에서 내가 좋아하는 부분을 찾아내는 나의 능력. 이건 역마살이 낀 내가 어디서든 살아남고, 살아가도록 만들어주었다. 그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찾은 서울 안의 서울. 늘어지는 서울은 사랑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