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ul Apr 26. 2020

다이어리를 빼앗겼다.

정신없이 사는 것을 멈추란 계시인 거죠?

여러분 혹시 여러분은 그럴 때가 있으신지요? 그게 지금은 아니신지요. 마음도 바쁘고 외부에서 해야 할 일과 압박도 밀려들어와서 오히려 일을 하고는 있지만 제대로는 못 하고 그냥 흘려보내는데 급급한 나날들을 보내고 계시는 건 아닌지요. 그래서 그 후폭풍을 제대로 맞기 전은 아니신지요.

누군가가

“정신 차려! 이제 멈춰!”

라고 뒤통수를 때려야만 할 일을 멈추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그런 상태는 아니신지요.


저는 이번에 다이어리를 잃어버렸거든요.


나는 파울로 코엘료의 정신을 좋아한다. 인생의 모든 일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 나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음을. 안 좋은 일이 일어날수록 그 일로 인해 바뀔 내 일상이 원래 그래야만 했음을, 그 변화를 위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벌써 제목에서 미리 스포를 했다, 그렇다. 나는 이번에…


다이어리(겸 스케쥴러)를 잃어버렸다.

요즘 정신이 없었다.

어느 정도 정신이 없었냐면….. 정신이 없는 걸 무의식 중에 알면서도 이를 위한 대처 같은 것을 할 정신도 없었다. 그 예시로 같이 사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잘 못 듣고 (정확히는 대충 듣고) 그들을 서운하게 한 일도 있었고, 오랜만에 집에 가는데 사실 ktx 표를 서울-> 집 이 아니라 집 -> 서울로 끊었다는 것을 기차 타기 10분 전에! 표를 끊은 지 1주 만에 알았다. 게다가 돈도 계획 없이 써서 용돈 받는 주제에 저금을 야금야금 몇 번이나 깼는지…..

험한 꼴을 당하고 겨우 집에 왔다. 오랜만에 밥을 얻어먹고 짐을 정리하다가 깨달았다.

다이어리가 없어!

잠깐 멍 때렸다. 안에 뭐가 있더라? 조금 예민한 정보는 있지만 큰 개인정보 같은 건 없었고 다시 뽑을 수 있는 간단한 서류들, 해야 할 일 정리해온 것들…. 

이 정도면 지갑 잃어버린 것보단 나은 건가? 아니!

선물 받은 건데!

그건 내 친구가 선물해준 것으로 아주 고급스러운 표지와 큰 크기, 그리고 속지까지 일일이 체크하면서 나를 위해 소비한 친구의 시간으로 이루어진 나에게 가장 소중한 스케줄러 겸 다이어리다.

영혼이 빠져나간다. 물건을 잘 잃어버리지도 않는데, 아니, 하필 그걸? 나 진짜 정신없었구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게 대체 어디 있는 거지? 역? Ktx? 들렸던 식당? 우체국? 빵집? 분명히 들고 나왔다. 들고 다녔다…젠장, 들고 다녔다.

해야 할 일들과 내가 느끼는 압박이 그대로 적힌 그 스케쥴러는 아주 산뜻하게 없어졌다. 내가 가진 압박과 해야 할 일들이 정말 산뜻하게 없어질 수 있었구나. 이렇게나 아무렇지도 않게 꿈처럼 펑! 하고 없어질 수 있었다.

뭐지. 일단 잠시 멈추란 말인가? 내 인생이 나에게 휴식과 나를 돌아볼 시간을 억지로 준 것일까?

사실 요즘 몸도 안 좋았다. 정신적으로도. 잠도 깊게 못 잤다. 어느 날은 하루에 불합격 통보를 3 군데서 받아서, '3군데 떨어졌으니 6군데 지원한다’라며 의지를 불태우다가 금방 꺼졌다. 그때 필요한 건 6군데의 지원이 아니라 몸도 마음도 피곤한 나를 달래주는 위로였는데 말이다. 내심 알면서도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며 나는 채찍질을 해댔다.


나는 가끔 브레이크가 고장 나곤 한다. 그럴 때마다 억지로 모든 기능이 다운되는 일이 생긴다. 예전에는 뜬금없이 손가락 하나도 못 할 정도로 며칠을 앓으면서 억지로 쉬게 된 일이 있었고, 지금은 다이어리를 뜬금없이 잃어버렸다. 빼앗겼다는 표현이 더 낫겠다. 내 인생이 ‘제발 그만 좀 해!’라며 그 다이어리를 빼앗아버렸다. 더 심한 걸 빼앗기기 전에 잠시 쉬어야겠다. 물론, 여전히 자소서를 써야 하지만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단골 카페`를 찾는 초능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