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선물용과 내가 마시기 위해 좋아하는 곳에서 예쁘게 포장된 드립백을 샀다. 당장 꺼내보니 역시, 맘에 드는 디자인이다. (디자인에 대해서는 1도 모르지만 내 맘에 들었으니 그걸로 되었다.) 예전이라면 당장 드립백을 뜯어서 커피를 내렸겠지만, 다시 넣어두고 포장을 접었다. 내일 아침에 처음으로 뜯을 것이다. 침대에 누워서 내일 뜯을 드립백 생각에 웃음이 나온다.
사소하지만 이게 많은 힘든 일들이 겹쳐버린 내가 내일로 가는 방법이다.
좋은 것을 내일 아침으로 미루는 것이다. 다만, 이 기준이 말로 표현하기엔 애매하고 복잡하다. 지금 당장 안 해도 괜찮지만 하려고 하니 기대되는 가능한 한 빨리 하고 싶지만 지금 당장 안 할 만큼 참을만한 크기의 무언가. 이렇게 적으니 복잡하지만, 그냥 ‘감’이다. 우린 알고 있다. 빵 모서리를 얼른 먹어버리고 잼이 발려진 부분을 먹을 때랑 빵 모서리는 잘라내고 잼이 발려진 부분만 먹을 때, 많은 기준을 세워놓던가?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잘라낸 모서리는 나중에 계란에 튀겨도 된다. 하고 싶은 일이 당장 해야 할 정도의 큰 기쁨이면 이런 생각 하기도 전에, 이미 해버렸겠지. 하기 싫은 일이면 미루고 또 미뤄서 지구 최후의 순간이 되어서야 할 것이고, 미루는 게 즐겁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일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분명, 정해진다.
예전에, 우울증이 최고조였을 때, 나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하루만 삶을 연장하자’고 적었다.
이 글이다. 1년도 넘은 글이고 브런치에 올리기엔 꽤 다크하고 적나라한 이야기였기에 (그러나 필요하다면 언제든 다시 그런 글을 쓸 것이다.) 조회수도 라이킷도 거의 없는데 방금 보니까 페이스북에 공유가 되어있다.. 뭐죠?
여하튼,
아침에는 어제저녁에 미리 준비해둔 작은 선물을 꺼낸다. 준비해놓았다기보다는 아침에 하기로 미룬, 약간 기쁘거나 예쁘거나 정갈한 행동이다. 그때 하루씩 삶을 겨우겨우 연장한 나는 이번에는 어떻게 하루하루를 받아들일지 고민하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수능이나 고시를 준비해본 사람들은 추석에는 항상 혼자 남았을 것이다. 이번엔 다른 이유로 추석 때 혼자 남게 되었지만, 요즘은 하루하루가 혼자 남겨진 기분이다. 다들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변화를 맞이할 때, 나 혼자 조급하지만 할 수 있는 건 앉아있는 것뿐이라, 싸늘한 공기에 움츠리면서 음산하게 깔린 걱정을 애써 모르는 척하고 있다. 그런 나이기에, 오히려 하루하루의 ‘꾸밈’이 필요했다.
아침 말고 쉬는 날 오후엔,
취준생이라 주말이 정해진 건 아니고, 4일쯤 달리면 지쳐서 하루는 재충전해야 할 때가 있다. 모두가 지침으로 시작하는 월요일에 쉬면 짜릿하다. 늘 가던 카페가 있는데, 가끔은 다른 카페를 갈 때도 있다. 프랜차이즈는 사람도 많고 공부해야 할 것 같아서 쉴 때는 가지 않는다. 좋아하는 메뉴를 시키고, 이북 리더기를 켜거나, 책을 펼친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필사한다.
서류부터 탈락해서 힘이 빠질 땐 탬버린을,
선물 받은 led탬버린. 불 끄고 이걸 흔들면 신명 난다. 기분이 좋아지진 않고, 그냥 한번 피식 웃게 된다. 옆방 언니에게 미러볼이 있으므로 정말 힘들 때 빌릴 예정이다.
그 순간에는 이 책을,
어떤 순간에 읽을 책을 정해놓는 것도 도움이 된다. 감싸진 저 책은 네 번째 책수다에 실릴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 이미 여러 번 읽었던 책이지만, 직접 사서 포장을 해 놓은 이유는, 정말 힘들 때, 삶이 나를 공격하며 내가 꺾일 것만 같을 때, 내가 나를 자책으로 망치고 있을 때 꺼내기로 결심했고, 저번 주에 꺼냈다. 이런 식으로 순간에 정해놓고 바로 읽는 책도 좋다.
우울증이나 무기력증, 삶이 너무 허무할 때는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여기서 더 심각해지고 무기력증을 넘어 혐오감까지 든다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앞으로 나아갈 힘이 과거의 실패 때문에 없어지고 있다면 개리 비숍의 <내 인생 구하기>
인간관계에 너무 지쳐있거나 스스로가 긴장되어 있음이 느껴진다면 하정 작가의 <이런 여행 뭐, 어때서>
갑갑해도 결국 떠나지 못했던 여행은 과거의 여행으로,
나는 나를 위해 돈과 시간을 잘 쓰지 않는데, 여행에서는 마음껏 썼다. 삶도 여행 살듯이 살고 싶다. 갑작스러운 변수에 그렇게까지 당황하진 않았다. 바다가 있으면 더욱. 그냥 앉아서 바다나 보다가, 커피나 마시러 가지 뭐... 하고 말았다. 혼자였든 누군가와 함께였든, 추억하기에 여행만큼 낭만적인 건 없다. 요즘 같은 나날에 더욱, 가고 싶다. 어디로든.
현실을 부정할 순 없다. 이미 흘러가버린 건, 보내줘야지. 그것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일 테니까. 좌절하고, 몇 날 며칠 또 다운되어 있더라도, 또다시 할 수밖에 없다. 순간의 조각들을 모아가며 조금씩 살아나갈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