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ul May 11. 2021

삶 자체가 질릴 때,

더 이상 누구의 눈도 보고 싶지 않다.

예전부터 자주 적었던 말이지만, 나는 건강한 기대를 못한다. 일단 기대하지 않으면 무조건 실패해도 성공해도 실이 될 것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집에 갔을 때, 나의 이 ‘긍정적이고 건강한 기대를 못하는’ 모습의 토대를 발견했다.




숨이 턱 막힌다. 손톱을 물어뜯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최종 면접을 본 후에 한참이나 연락이 없다. 그러면 불합격이란 것은 대충 예상하겠는데, 여기가 불합격을 연락 주지 않는다는 소문이 없는 회사였다. 그렇기에 혹시 불합격이라도 메일로 알려주시냐고 인사과에 메일을 보냈다. 며칠째 답이 없다. 채용 마무리 전에는 문의사항에 그렇게 빠르게 답이 왔는데. 혹시 불합격한 사람은 쓸모가 없어서 아예 답을 안 하는 걸까?


갑자기 집에 오란 말에 인턴 전환 실패 후 한 번도 집에 내려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이렇게 집이 불편한 곳이었나. 부모님은 나를 앉히자마자 본론부터 얘기했다. 도대체 뭘 하고 있느냐고. 지금 네가 살이 찐 것도 난 맘에 안 들고, 기업으로 취직하려는 것도 맘에 안 든다. 결과가 객관적인 시험을 쳐서 들어가는 직종으로 내년에는 바꾸겠다고 말해라.

지금까지 엄마와 아빠가 괜히 기대할까 봐, 말하지 않았던 상황들을 말했다. 지금 대기하는 면접은 없다. 최종 면접을 보고 결과를 기다리는 A기업이 있다. 서류를 합격해서 면접까지 간 것은 B, C 정도이다. 이제 다시 서류를 넣고 있다. 00이라는 기사 자격증이 6월 접수 예정이라서 준비하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안됐잖아, 그렇지?


엄마의 말버릇이다. 그리고 항상 내 인생의 결론이었다. 하지만 안됐잖아, 결국, 못했잖아.


그리고 그냥 다 내려놓고 말한 김에, 최종 면접을 궁금해하길래 그 후기도 알려줬다.


나: 00이라고 묻길래 00라고 대답했어. 그러니까 면접관님이 00이라는 말을 하더라 (세간에 따르면 긍정적인 반응 1).

엄마:하지만 그건 오히려 나쁜 의미일 수도 있어. 네가 너무 자유로워 보인다는 거지.

나:그리고 &&에 대해서는 &&라고 말했어. 그러니까 &&라는 반응을 얻었어. (세간에 따르면 긍정적 반응 2)

엄마:하지만 &&는 다른 의미로는 안 좋잖아. 안 좋은 의미일 거야. 안될 거야.

나:?

엄마:안될 거야.




어차피 안될 거야. 기다리지 마 기대하지 마. 합격자들한테는 이미 문자 갔어. 너는 불합격 자니까. 안 올 거야. 아무것도.


‘안될 거야 봇’과 이야기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항상 쾌활하고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엄마의 이면에는 이런 모습이 있었다. 오랜만에 엄마의 눈을 보았다. 나만큼 지쳐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알바 구해.

하지만 내 인생이라서 내가 제일 지쳐있다는 건, 나만 아는 사실이다.


최근에 친구를 하나 잃었다. 그 친구도, 대답 없는 인사과도 닮아있었다. 그 친구도 대답이 없었다. 그냥, 말을 안 했다. 다른 얘기를 하면 대답을 잘했다가, 원래 있던 문제로 화제가 돌아가면 아예 안 본 척을 했다. 자신이 답을 해줘야 나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아주 잘 이용했다. 그들이 답을 하지 않음으로 병이 들어가거나 조급 해하는 건 오로지 나일뿐이란 것도 그들은 잘 알았다. 솔직히, 그 회사도 그 친구도 나는 저주하고 싶다. 에너지만 있다면. 그럴 에너지가 내게 없다는 사실마저 분하다.

왜 나는 항상 남들이 쉽게 구하는 것을 몇 년은 늦게 구하는 건지. 그 늦춰짐을 감당할 상황은 왜 안 만들어지는 건지.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이제 안 하지만, 왜 나는 안 되는 건지. 왜 안된다는 말 말고는 대답으로 들을 수가 없는 건지. 무응답을 하는 그 모든 이들에게 분노의 돌을 던지려다가, 그것마저 나를 더 안되게 만들 뿐이란 것을 알고 그저 뒤돌아 가는 게 나의 최선인 걸까. 충분히 많은 것을 포기해왔는데 나는 뭘 더 포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뤄낼 것이 아니라 덜어낼 것이 남아있는지 확인하는 나날들은 삶 자체를 거추장스럽게 만든다.

작가의 이전글 <너라는 청춘> 서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