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해야만 글을 쓰는 작가라니

나는 절망해야만 글을 쓸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런 두려움이 들었다.

by chul



난데없이 절망했다. 쓰고 싶은 이야기가 없다! 그러다가 면접에 떨어졌다. 갑자기 이야기가 생겼다. 이 짧은 순간 나는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나는 절망해야만 글을 쓸 수 있는 게 아닐까?

등골이 오싹해진다. 그러면 내 브런치와 글들은 감정 쓰레기통이나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시간을 들여서 글을 읽어주고 그림을 봐주는 모든 사람들에게 실례가 된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도, 결국 내가 어디에 내 이야기를 호소할 데가 없어서였다. 결국 처음부터 감정 쓰레기통으로 시작한 브런치였다.

처음 몇 년 몇 달은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나는 원래 글과 먼 공대생이었고 그림이나 가끔씩 그리곤 했으니까. 처음에는 일기와 에세이 그 어중간한 글로 그냥 사람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받는, 주체가 전복된 글을 쓸 수도 있다고, 과거의 나를 용서해보자. 하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다. 내가 절망스러운 글을 쓰는 이유는 내 상황이 절망밖에 없어서일까 아니면 내가 절망 아니고는 얘기를 할 수 없는 작가여서일까? 둘 다일까? 둘 다 정말 별로다.

아니 애초에 나를 작가라고 할 수 있나? 브런치에서는 다들 작가라는 호칭을 쓰니까 자연스럽게 브런치에서 글을 쓰는 나는 작가라고 불리게 되었다. 나 같은 아무 글이나 쓰는 사람도 작가라는 호칭을 갖게 해 준 브런치의 후한 체계에 감사하며.. 다시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생각해보았다.

사실 글을 쓰기보다는 그냥 잘되고 싶다. 요즘 워낙 되는 일이 없어서 그런가, 일단 직장을 가져야 자기 먹고살 것은 챙기는 기본권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최근 나의 관심은 온통 나 자신이 어떻게 하면 '덜 무너질지'에 대한 생각뿐이다. (어차피 취준 기간에는 무너지는 상황은 자주 오니까.) 그래서 무너질 때마다, 절망할 때마다 글을 썼나 보다. 그래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절망 외에는 없는 작가가 되고 싶지 않다. 밝거나 희망찬 글을 쓰고 싶다기보다는, 이야깃거리가 많은 작가가 되고 싶다.

그러고 보니 (이 접속어 정말 이 글이 의식의 흐름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작가라는 호칭이 나와 어울리지 않게 무거운 호칭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다. 최근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었다. 정말 그냥 작가가 달리기 하는 이야기인데 그게 책 한 권이 나온다. 작가란 이런 대단한 존재다. 나는 한 요소를 가지고 책 한 권이나 하는 이야기가 없다. 만약 내가 달리기에 대해 쓴다면 최근에 다리를 삐어서 아스팔트에서 구른 이야기로 기승전결이 끝나버릴 텐데.

어찌 되었든 절망만 노래하는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내가 좀 난데없이 절망을 하는 타입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왕 나를 찾아온 글이라는 예상치 못한 선물을 그럴 때만 쓰고 싶진 않다. 그런데 뭐, 좋은 일이 일어나야 말이지. 흐음. 다양한 일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 오늘도 할 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