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 망한 거 폼나게 사는 중.

4년 된 중고 노트북이 고장 나서 급하게 키보드 샀더니 이지경.

by chul

아직 10월도 아니건만, 수능 냄새가 공기에 묻어있다.

수능을 두 번 이상 쳐 본 사람들만이 맡을 수 있다는 그런 냄새. 그 냄새는 큰 무언가가 지나가고 한 해가 끝나감을 냄새라는 형태로 내게 알려준다.


책을 몇 번이나 덮었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주변 친구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잡아가지만 공백기만 늘어가는 나였기에, 책에서 힘을 얻고 싶었다. 너무 위안을 주려는 책은 오히려 맞지 않았다. 나는 내 마음보다 현 상황을 바꾸고 싶었다. 그러니까, 비겁하게도 ’아주 형편없고 아무것도 없었던 젊은이가 자신만의 방법으로 세상에 자리 잡은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되길 바라면서 그런 책을 찾고 싶었다. 내가 얻고 싶었던 것이 희망인지 위로인지 위안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다만, 모든 책의 예시(불행한 사람이 멋진 사람이 된 스토리에서 ‘불행했던’ 순간)는 항상 이런 표현이 있었다.


그는 직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수라는 꿈이 있었지만 현실에 타협하여 직장을 얻었다.


퉤. 또 책을 덮었다. 책 읽는 사람은 취직도 못 했습니다. 내가 미친 듯이 노력하고 있고 간절히 바라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아니, 다수에게는 당연하고 질리는, 벗어나고 싶은 별 거 아닌 일이구나. 나는 그것조차 해내지 못하고 있구나. 시간은 흐르고 나는 남아서, 평생 이렇게만 살 것 같다. 다들 자리를 잡아가지만 나는 더 초라해질 일만 남았겠지. 남들은 수군거리고, 쟤처럼은 안 되어야지의 ‘쟤’를 맡게 될 것이다.


그러라지.

KakaoTalk_20210814_001556249.jpg 어쩌다 보니 내 것이 된 레인보우 키보드 그리고 왜인지 집에 있던 탬버린

2년이 나에게 무엇을 줬을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스스로가 초라해지고 나의 위치가 민망하지만 비참하지는 않다. 이 긴 절망이 일상인 나날들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물론, 이런 내가 되지 않고 바로 취업이 되었으면 좋았겠지. 누군가에게 이런 성장의 감회를 느끼기 위해서 취업을 늦추라고 하지도 않겠다. 최대한 남들 따라 인생의 흐름이 흘러가는 게 좋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이렇게 되어버린 걸. 그래서 내 삶이다. 이 긴 시간이 남들과 다른 나만의 특징이라면 이를 특성으로 바꿔버릴 것이다.


이제 나는 일을 찾아간다. 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올해 안에 일을 시작하는 사명만 가지고 있다. 수능 냄새를 맡으며 한 해가 끝나감을 직감하는 나는, 올해 과연 어디에서 잠을 청하게 될까.

어쩌면 남들과는 다른 시작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정이 든 이 마을과 시간, 익숙해진 패턴들을 갑자기 떠나보내야 할 때가 올 수도 있다. 나는 어떤 형태로 사회에 나가게 될까? 이런 나를 누군가는 패배자라고 말하겠지. 날 위로하면서 자신을 위안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만이 많아진 나는, 분명 언젠가 이 시간을 돈으로 사고 싶을 때를 위해서,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나씩 시작하려고 한다. 이번에는 더 철저하게, 끈질기게, 다양하게.

이 글을 보며 감회가 새로울 미래의 나 자신을 위해 나는 오늘도 이렇게 된 김에 탬버린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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