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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ul Oct 18. 2021

여수할아버지는 단걸음에 달려가서 사오신 뿌셔뿌셔를,

끓어벼렸다.

라면, 라면 사주세요!


맞벌이 부부였던 엄마와 아빠덕에 나와 동생은 자주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댁에 맡겨졌다. 참고로 나는 외, 친 이란 말을 안 좋아하는데다가 우리집은 순서대로 그곳을 여수, 진주라고 불렀다. 자연스럽게 여수할아버지, 여수할머니, 진주 할아버지, 진주 할머니라고 여전히 부르고 불리신다.


주사를 맞아도 머엉하던 아직 어린 동생과 다르게 나는 한창 미운 나이였다. 이번에도 여수에 맡겨졌고, 당시 공무원을 오래 지내셨던 여수 할아버지는 시내에 나갈 일이 많았다. 그날도 맡겨져서 뒹굴거리고 있는 나와 동생에게 할아버지는 무엇을 사올까, 하고 물어보셨다.

그때는 무조건 엄마와 아빠 없을때는 라면이었다. 진주는 작은 구멍가게였기때문에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부모님들 눈을 피해 라면을 끓여줬지만 여수는 그 흔한 슈퍼도 없었다. 지금은 없어서 못 먹고 먹고싶어서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나는김부각, 진한 식혜, 여수 특유의 진하지만 짜지 않은 양념이 된 가자미, 갈치, 꼬막무침과 소고기 없는 조개 미역국만 늘 먹었다. 우리집은 배달음식도 일년에 한두번 시켜주고 라면은 아예 사놓지도 않았기에 머리를 굴려서 라면을 사달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특유의 당당한 풍채로 검은 봉지를 상패처럼 들고 오셨고 곧바로 부엌으로 향하셨다. 할아버지가 끓여줄게, 위험하니 거실에 있어라. 할머니는 갓김치를 썰었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촉이 굉장히 좋다. 무슨 라면을 사셨지? 혹시나 하고 머릿속에 라면같은 과자가 떠올랐다. 놀아달라는 동생을 튕겨내고 부엌으로 가자 불고기맛 국을 내고 면을 넣으려는 할아버지가 엉거주춤 있었다.

여기까지 말하면 다들 무슨 맛이었냐고 눈을 반짝이면서 물어보는데 죄송하게도 먹지 않았습니다. 일단 면을 넣기 전에 내가 할아버지를 말렸기 때문에 불고기맛 국물은 싱크대로 버려졌다. 이렇게 다들 궁금해할 줄 알았으면 한번 계란과 김치까지 넣어서 푹 끓어보는건데. 아쉽다, 나는 재밌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어쨌든, 어린나이에 분명 아쉬웠어야 할 일인데 너무 그 상황이 웃겼다. 라면을 먹으려고 할머니가 빤딱하게 닦아놓은 은쟁반 상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수저와 손주들 먹기 좋게 잘린 갓김치들. 그리고 주인공인 라면냄비를 기다리는 센터의 받침대. 옆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니킥뿌셔들.(물론 저는 나이가 좀 있기 때문에 당시에 샤이니가 광고하진 않았습니다. 뾰족머리의 소년이 발차기를 하고 있는 캐릭터가 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다시 찾아보니까 망치로 면을 패고있네요.)

상황을 그 4명중 혼자 파악한 죄로 나는 하루종일 집이 떠나가라 웃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 요상한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동생은 어렸고, 할머니는 아예 그 상황을 몰랐고, 나는 살아있고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기때문이다.


내 동생은 애교도 많고 꽤 똑부러지며 (누나인 내가 보기엔 그냥 부러진) 야무지다는 면에서 나와 정반대인 녀석이다. 그래서 여수든 진주든 할머니, 할아버지, 여러 어른들에게 사랑받는다. 여수 할아버지또한 항상 기특하다며 내 동생의 여러 일화를 이야기해주곤 했다. 인정하진 않았는데 꽤 서운했던 것 같다. 끓여질 운명에 처한 뿌셔뿌셔만이 나와 할아버지가 공유한 유일한 요소일까. 이것도 나만 기억했을지도 모른다. 상관없다. 덕분에 나는 라면을 먹을때마다 허허실실 웃고 있으니까.



+여러 글을 쓰고 있는데 춥고 상황도 별로라 그런지 따뜻한 글이 땡겨서 한 편 써 보았습니다. 따뜻할지는 모르겠지만 끓인 불고기맛 국은 뜨거웠으니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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