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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ul Nov 09. 2021

취향이 향이 되던 그 순간.

이렇게 겨우겨우 살아내어서 나는 내가 된다.

지금까지 나는 싫어하는 것들을 배재해서 취향을 찾곤 했다. “얘네는 싫진 않으니까 무난히 해보자”하고 별 감명 없이 살아왔다. 싫어하고 절망하는 몸부림보단 나으니까.

요즘은 좋아하는 향과 물건들을 찾아가고 있다. 그 여정에 내가 성장했음을 실감한다.


한때 별명이 코장(코 고장 = 냄새나 향을 거의 구별 못하고 무던해서 지어진 별명)이었던 내가 요즘은 다양한 향으로 일상을 꾸미고 있다. 꾸밈은 시각적, 비주얼적으로 예쁜 물건들을 사서 가능한 줄 알았다. 내 짧은 식견이었다. 향과 같은 분위기, 후각처럼 보이지 않는 것들로도 꾸밀 수 있었다.

그렇게 커피를 좋아하면서도 커피의 향은 잘 못 알아챘다. 산미나 바디감의 정도를 겨우겨우 알아내서 내 취향을 소거법으로 분류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나는 ‘머스크, 우드, 시나몬’이란 단어를 좋아하더라. 아무래도 쾌쾌 묵은 분위기에 녹아있기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나의 첫 향 제품은 G사의 ‘샤쉐’(Sachet)였다. 방향제라는 직관적인 단어만 알던 내게 갑자기 다가온 샤쉐, 향낭이라는 고급진 물건들. 보통 어딘가에 걸어두어서 은은한 향을 풍기기 때문에 옷장이나 자동차 같은 좁은 공간에 둬서 선물하기도 좋다. 집 주변에 핸드크림, 샤쉐, 향수 등으로 유명한 G사가 생겨서 친구에게 끌려들어갔다. 친구는 익숙하게,

“플로럴 향도 좋은데 조금 상쾌한 향 있나요? 가볍게 쓰기 좋은, 우디 계열은 좀 무거워서요.”

라는 ‘은, 는, 이, 가, 요’ 같은 조사만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해댔다. 서브웨이 처음 갔을 때 친구가 주문해주던 그 느낌과 아주 비슷한 당혹감이었다. 그중 내 눈에 들어온 향의 이름.

‘규장(Kyujang)’

직원분은 이 향은 우디에 무거운 책이나 목재 같은 느낌의 향이라며, 마이너한 취향이지만 그 사이에선 확실한 인기를 끌고 있다는 설명을 덧붙이셨다. 규장각이요? 네 그 조선시대 왕실 도서관 규장에서 따왔어요.

시향지를 건네받은 순간, 알아챘다. 나는 이 향을 좋아할 것임을. 좋아해 왔음을. 그게 무엇인지 몰랐을 뿐이다. 내가 좋아했던, 도서관의 그 모든 장면들. 힘든 일 있을 때마다 커피 한 잔을 사서 도서관의 맨 끝에 가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다가 햇빛에 비치는 먼지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 순간들. 그때는 싫어하는 것들에게서 도망친 줄 알았는데, 나는 그 순간을 좋아했구나. 좋아해서 그렇게 그 안으로 그렇게 파고들었구나.


그렇게 냄새를 없애는 용이 아니라, 향을 묻히는 용도의 제품이 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후로 나는 향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최근에는 ‘몰튼 브라운 진저릴리 바디워시’를 알게 되었다. 씻기만 하면 되지 않나? 하면서 아무거나 싼 바디워시를 집었던 나도 이제는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 비싼 바디워시를 사는지 공감을 하게 되었다. 참, 아직 안 샀다. 하지만 베이스에 우드랑 머스크가 있음을 보고 내가 좋아할 향임을 짐작할 수 있다. 아마 사면 후회하지 않겠지.


어느 정도 표현할 수도 있다. 최근에 선물을 할 일이 잦았는데, 그때마다 “어머니께 드릴 건데, 너무 스위티 한 거 말고요, 가벼운 플로럴 향이 있을까요? 머스크는 취향이 아니실 것 같아요” 혹은 “직장인 20대 여자인 친구한테 줄 거라서 너무 화려한 느낌보단 상쾌하고, 레몬이나 오키드가 주였으면 좋겠어요.”와 같이 상황을 묘사하며 원하는 제품을 고를 수 있다.

게다가 향으로 누군가를 짐작한다는 게 상대방 입장에서는 굉장히 몽글한 기분이 든다. 나만해도 핸드크림을 고르던 중, 특정 향을 기웃거리자 직원분이 “이 향 좋아하세요? 그러면 규장 좋아하실 거 같아요”라고 맞췄을 때 행복한 러시안룰렛이 되었다. 선물을 줄 때도 내가 왜 너에게 이 제품을, 이 향을, 골랐는지를 조목조목 말해주다 보면 정말 그 향이 취향이 아닐지라도 상대방은 기뻐했다. 내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파악하는지가 묻어 나오기 때문인 듯하다.

싫음을 피하는 대신 좋다며 노래할 수 있다. 향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기꺼이 걸어 나간 첫걸음이었다.

결국 살아간다는 건, 나를 잘 알게 되는 과정인가 보다. 그렇게 힘들게 겨우겨우 살아가면서 알게 되는 게 내가 우디향, 산미가 있는 무거운 커피, 저녁보단 아침 독서를 좋아한다는 tmi들이다. 조금 초라하기도 한데,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까. 살아가면서 내가 기꺼이 된다. 내 인생을 들여다보는 사람에게 우디와 머스크 향이 전해지길 바란다. 나는 그런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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