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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ul Nov 22. 2021

고배를 숭늉처럼 마셔버리고 갈 길 가기.

그냥 할 일 하자.

요즘 고배를 숭늉처럼 별 의미 없이 숭덩숭덩 넘겨버리는 연습을 하고 있다. 무너질 때는 제대로 무너지지만, 그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는 연습이다. 그 고배의 맛을 음미하고 있었더라면, 유일하게 정규직이 되지 못한 인턴으로, 채용 취소를 당하고 일주일을 출근해야 하는 그 시간에 남아서 인생을 망쳐버렸을 것이다. 그런 거지 같은 상황을 겪은 후에, 빌빌 거리며 울면서 집에 처박혀 있지 않고 바로 바다를 보러 간 건,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다.

기차를 타고 돌아와서 바로 채용공고를 살핀 '전환'의 상쾌함을 기억한다.

아직 사업을 시작하지도, 취직을 하지도 않은 20대에 이런 굴욕이나 비참함을 겪을 일은 잘 없겠지.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고 생각해보았자 쌀 한 톨도 나오지 않았다. 동기들의 은밀한 안심이나, 나를 위로하면서 드러나는 이상한 우월감에 오랫동안 기분 나빠해 보았자 나만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런 정리된 생각까지 갖추지 않아도 된다. 그냥 얼른 다른 것을 찾아서 해야 한다. 걸어가야 한다.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한때는 나도, 여러 트라우마로 인해 그 자리에 주저앉아있었다. 계속 비참해하고 울고 왜 이지경이 되었는지 굳이 나였어야 하는지 한숨을 쉬고, 잘 사는 남들의 일상에 분노했다. 그렇게 계속 그러고 있어 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 왜냐면, 나처럼 어느 순간 깨닫게 될 거니까. 내가 이 순간에 멈춰 있어도 시간은 흐르고 살아갈 날은 지겹도록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이럴 수가, 망했다, 살아있는 시간이 앞으로 지금보다 더 많다니 번거롭고 거슬린다. 그래서 쥐어뜯던 머리를 다시 빗고 묶었다. 헝클어진 머리로 다닐 순 없으니까.

아이고, 이제 뭘 하지?

그렇게 나는 새벽 헬스를 끊었다. 안경을 바꿨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정리했다.

끊임없이 '전환'하고 있다. 결과가 기대될만한 무언가를 하더라도, 기다리진 않는다. 물론 좋은 소식에 귀를 쫑긋하게 되지만 그러면서도 또 끊임없이 할 일로 밀려들어갔다. 당연히 하나라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나의 여정은 한국 사회가 좋아하는 '어떤 목표를 위해서 끊임없이 해온 일관성 있는 활동이나 가치관'이 없다. 그러나 이 '전환'이 끊임없이 해온 나의 일관된 활동이다. 굳이 목표를 만들어내자면 '남은 일생 살아가기'정도가 될 것이다.

끊임없는 고배를, 작고 크게 마시는 나날이다. 사람마다 그 고배를 대하는 태도는 다르다. 쓰지만 누군가에겐 이 정도는 안 쓸 수 있고, 오히려 술이 좋아서 맛있는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쓰다. 써서 쓰다고 칭얼거리고 소리친다. 얼른 마셔버리고 다른 것을 먹어서 최대한 그 고배의 여운을 덧칠한다. 남은 잔은 과감히 쓰레기통에 던진다. 어쩌면 내가 걸어가는 길엔 따뜻한 커피가 아니라 고배가 손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 고배 들고 횡당보도 한가운데 서 있기는 더 싫다. 그래서 숭늉처럼 마시고 버리고 눈앞의 바뀐 신호에 맞춰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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