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될 뻔 했는데, 참새가 됐지 뭐야”
나는 내 이름을 오랫동안 싫어했다. 그 시작은 일곱 살, 설레며 입학한 유치원에서였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때 흔한 이름노래)
“나아는~ 윤경애.”
“그 이름 참새 같구나.”
…뭐? 참새라고?
친구들 이름은 공주님, 왕자님 같다더니
왜 나는 조류인가.
그것도 제비나 공작이 아닌, 참새.
작고, 시끄럽고, 동네 오빠들이 고무줄로 쏘아대던
그 참새 말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내 이름이 참 부끄러웠다.
선생님의 의도는 순수했겠지만,
나는 어린 마음에 그 말 한마디로 상처를 입었다.
“엄마, 내 이름 왜 경애예요?”
그날 이후로 나는 기회를 틈틈이 노렸다.
엄마를 붙잡고 묻는다.
“오빠는 장일인데, 나는 왜 경애예요?”
“오빠는 중자 돌림 싫어서 ‘장일’로 바꿨어.
너는 원래 장미 하려고 했는데...
너를 낳고 힘들어서 아빠한테 이름 맡겼지 뭐.”
아빠는 읍사무소에 가다가 옆집 아이 이름이 ‘라경애’인 걸 보고, 그냥 ‘경애’로 신고해버렸단다.
헐.
이토록 단순하고 무계획한 이름 탄생기라니.
장미로 태어날 수도 있었던
나는, 참새로 불렸고,
그 이름이 사연도 없이 나에게 붙어 있었다.
고등학생이 되어 도서부에 들어갔다.
책이 좋았다. 조용한 서가가 좋았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 울컥했다. 왜?
거기 나오는 ‘경애’들은 하나같이...
미군을 상대하던 여인들이었다.
(한국전쟁을 다룬 시대 소설이 많았다.)
슬프고 분노스러운 마음에 개명을 꿈꿨다.
그리고 동시에 아빠에 대한 원망도 차곡차곡 쌓았다.
몇 해 전, 우연히 서점에서
김금희 작가의 소설 『경애의 마음』을 만났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경애”라는 글자가
제목에 떡하니 있는 것이다.
속으로 외쳤다. “오, 이건 내 이야기야!”
하지만 곧 다시 책을 덮었다.
기대했던 경애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중에 끝까지 읽었다. 작가님 죄송합니다.)
지인들은 내 이름이 얼마나 좋은 줄 아느냐며,
“경애하는 경애 씨~”라 부른다.
고맙지만, 나는 아직도 약간 멈칫한다. 왜냐고?
나는 ‘공경할 敬’도, ‘경사 慶’도 아닌,
‘서울 京’이기 때문이다.
그냥 서울. 그냥 경애.
(물론 서울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게 나는 장미 될 뻔한 참새였고,
아무 뜻도 없이 지어진 이름을 붙잡고,
한동안 좀 많이 억울했다.
문득 생각해 본다.
그때 선생님이 “그 이름 참새 같구나” 대신
“그 이름, 햇살 같구나”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소풍날 비 오지 않기를 기도하던 나는,
햇살이라는 말을 평생 품고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이름이라는 게 별거 아닐 줄 알았는데,
그게 사람 마음에 오래 남는다.
나는 ‘경애’라는 이름에
참새 같다는 말 한마디를 덧붙여서
한참을 작고 소란스럽게 살았다.
나도 모르게, 그 말에 나를 끼워 맞추며 살았던 거다.
아이들은 불린 대로 자신을 믿고,
그 말대로 살아가려 애쓴다.
그게 비록 장난 섞인 말 한마디였어도,
어린 마음은 그걸 진심처럼 품는다.
그러니, 이름을 부를 때,
그 안에 사랑을 좀 넣어주자.
멋진 뜻 몰라도 괜찮고, 한자 헷갈려도 괜찮다.
그냥, 그 아이가 불릴 때마다 조금씩
따뜻해지는 이름이면 된다.
그리고
“엄마, 내 이름 왜 이래?“
혹시 아이가 물어보면,
그럼 이렇게 말해주면 어떨지..
“너를 처음 안고 제일 먼저 떠오른 마음이 그거였어.
그래서 그 이름이야.그때는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꽤 괜찮은 선택이었지 뭐.”
나는 참새 같다는 말에 한동안 머물렀지만,
결국 나답게 살고있고
내 이름을 내 이야기로 만들었다.
그러니
뜻 좀 부족해도, 선택이 즉흥적이었어도,
사랑이 담긴 이름이면,
그 아이는 분명
그 이름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자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