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를 미워했던 아이, 엄마의 눈으로 아빠를 본다는 것
“다시는 참새라 부르지 마오.”
어릴 적, 나는 내 이름이 싫었다.
이름은 나를 부끄럽게 했고, 어딘가 숨고 싶게 만들었다.
그 이름을 지어준 사람은,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었다는 걸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지난주, 아빠를 뵙고 왔다.
대전 현충원, 712번 묘역.
군인다운 묘비들이 반듯하게 줄지어 서 있는 그곳에서
내 눈엔 단연 아빠의 묘비가 가장 빛나 보였다.
‘육군 원사 윤병덕.’
나는 조심스레 묘비 앞에 쪼그려 앉았다.
손엔 새 꽃을 들고, 마음엔 오래 묵은 말들을 들고.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아빠 안녕?
나 보고 싶다고 자꾸 꿈에 나타나면 반칙이지.”
‘아빠’라고 부르는 순간, 기억의 창고에 불이 켜지고
그 안에서 참새가 또르르 날아올랐다.
아빠는 나를 혼낸 적이 없다.
딸바보였고, 나를 예뻐해주던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아빠를 미워했다.
엄마의 눈을 통해 아빠를 봤기 때문이다.
흥 많고, 사람 좋아하고, 술 좋아하던 아빠.
그런 아빠를 이해하지 못했던 엄마.
엄마가 느꼈던 감정을 고스란히 빌려
나는 아빠에게 퉁명스러웠다.
엄마가 직접 하지 못한 말들을
나는 아이의 입을 빌려 아빠에게 건넸고,
아빠는 어떤 말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더 미울 수도 있었겠다.
결혼 후, 몸살로 끙끙 앓던 어느 날.
이상하게 짜장면이 미치도록 먹고 싶었다.
그게 뭐라고, 눈물까지 날 정도로.
그제야 떠올랐다.
어릴 적 내가 아프면,
아빠는 군부대에 전화해 짜장면을 시켜달라고 했다.
“우리 딸, 짜장면 먹고 싶대요! 빨리 좀 보내줘요!”
아빠의 장례식 날에 동네 중국집 사장님이 말했다.
“어르신이 따님 아프실 때마다 짜장면 얼른 배달하라고 그렇게 재촉하셨었어요.”
그 말을 들으며 나는 그저 조용히 웃었다.
울면 아빠가 미안해할까 봐.
아빠는 위암과 대장암을 앓으셨다.
아빠가 아프기 전까지, 나는 술을 전혀 마시지 않았다.
술자리가 어색했고, 그냥 입에 맞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아빠는 말했다.
“우리 딸이랑… 소주 한 잔 나누는 게 소원이야.”
나는 웃으며 대꾸했다.
“아빠, 이제 그만 드셔요. 그동안 많이 드셨잖아요.”
그때, 아빠 눈빛에서
반짝이던 무언가가 꺼지는 걸
나는 그제야 알았다.
이제 나는 가끔 와인을 마신다.
바쁜 하루를 마치고 잔 하나에 천천히 숨을 고르며 앉는 밤.
그때마다 아빠의 말이 떠오른다.
“딸이랑 소주 한 잔…”
못다 이룬 그 소원 하나가 와인 잔에 자꾸 비친다.
미안하고, 아프고, 그리운 말.
병문안도 미뤘다.
코로나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바쁘다는 핑계로.
그러던 어느 날, 아빠는 말했다.
“딸, 내가 돈 줄게. 블루베리 좀 사서 병문안 오면 안 될까? 요즘 그거만 먹히더라.”
나는 근처 마트에서 시든 블루베리를 집어 들고 병실로 향했다.
아빠는 기분 좋게 드셨고,
베개 밑에 숨겨둔 현금 50만 원을 내 손에 쥐어주셨다.
나는… 넙죽 받았다.
그리고 마스크를 다시 올리라고 재촉했다.
못난 딸.
아빠는 딸이랑 소주 한 잔 나누지 못한 채
중환자실에서 마지막 인사를 했다.
차례로 손을 잡던 마지막 순간,
내 차례가 되었을 때
아빠는 호흡기를 단채 힘을 짜내듯 입을 벌렸지만
나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아빠, 힘들면 이제 그만 말해.
그 마음 다 몰라줘서 미안해."
그리고 아빠는 아주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현충원에서 돌아온 날,
몸살이 나서 침대에 누웠다.
눈물이 한쪽에서 출발해 반대쪽 눈물을 깨웠다.
‘아빠, 나 아파… 짜장면 시켜줘.’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웅크린 채 아빠에게 말했다.
“I see you.”
이제야 엄마의 눈이 아니라 나의 눈으로 아빠를 본다.
"경애야"
어릴 땐 숨고 싶던 그 이름.
이제는 그이름을 따듯하게 부르는 아빠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아빠, 다음엔 소주 한 잔 하러 갈게.”
우리는 때로 부모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누군가의 감정에 빌려서,
혹은 어린 시절의 상처에 갇힌 채로 바라본다.
그러다 너무 늦게 깨닫는다.
그들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이제 나도 부모가 되었다.
나는 내 아이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내 말, 내 표정, 내 사랑은 어떤 의미로 남을까?
잊지 말아야겠다.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바라보고,
더 많이 사랑하겠다고.
부모의 사랑은 지금 이 순간에도
아이의 가슴속에 조용히 새겨지고 있으니까.
“I See You”
그리고 이제야
그 이름을 부르는 나도, 나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