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시간
"올해는 1등 경쟁이 재밌겠는데요?"
가정의 달 콘서트 초청을 위해 고객 개인별 실적을 집계하던 막내가 중얼거리는 것을 팀장이 낚아챘다.
"왜?, 김여사 아니신가?, 올해 실적이 부진하신가, 우리가 뭐 불편하게 해 드렸나?"
"그게 아니고, 새로 나타난 염여사님 실적이 만만찮은데요. 김여사 님은 전년이랑 비슷하고"
여기서 언급된 김여사는 지역 내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분인데, 몇 년 동안 개인 매출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최고의 VIP 고객이었다. 일단 본인의 취향이 확고하여 럭셔리 상품 구매가 많고, 회사 행사나 거래처 선물등도 꽤 많아 점 내 1위는 당연한 것이고, 전국 기준으로도 항상 10위권 안에 드는 큰 손님이었다. 그런데 올해 새로운 도전자가 나타났다니 흥미로운 일이었다.
"염여사, 염여사가 누구야?"
"왜 연초에 경쟁점 1등 고객이라고, 1층 매니저가 추천한 분..."
"아 그분, 교포 사업가!"
매년 연초 VIP 선정은 전년 실적을 기준으로 한다. 영업팀장이나 각층 매니저들이 자신들의 영업을 위해 일부 고객을 추천하기도 한다. 특히 명품과 화장품을 담당하는 1층의 경우, 백화점에서 해당 품목만 구매하고 다른 층은 이용하지 않는 고객을 추천하는 경우가 많다. 처음에 명품을 사기 위해 백화점을 이용하던 고객이 VIP가 되어, 다양한 초청행사와 서비스를 누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쇼핑 범위가 확대된다. 명품이 백화점 진입의 통로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이번 콘서트에 염여사를 꼭 초대하여 헤드테이블에 앉혀야지."
"1층 매니저에게 반드시 직접 모시고 오라고 전달하겠습니다."
그렇게 초청 고객 400명의 명단이 정리되고, 초청장 발송과 전화 안내, 좌석 배정이 시작되었다. 물론 그 뒤에는 행사에 들어가는 비용 이상의 매출을 올리기 위한 프로모션과 상품 준비등으로 전조직이 움직였다.
그렇게 준비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행사 당일, 1층 매니저는 난감한 표정으로 콘서트장에 나타났다.
"염여사가 회사에 중요한 계약이 있다고, 오늘 아침 갑자기 출국했답니다."
"무슨 소리야. 그렇게 중요한 계약이면, 미리 일정이 잡혀있었을 텐데, 어제까지 말이 없었나."
"그러고 보니, 여기서 염여사를 본사람은 자네뿐이군. 우리 VIP 담당 직원들도 뵌 적은 없지"
"라운지 이용도 안 하시고, 문화 강좌도 처음엔 신청했다 취소하곤 해서 저희도 궁금했습니다. 드디어 뵙는다고 약간 기대도 했었는데"
1층 매니저는 자신이 큰 죄라도 지은 듯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염여사의 자리는 비워둔 채로 콘서트가 시작되었고, 그날의 행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5월의 매출 목표도 무난히 달성되어 가고 있었다.
5월의 마지막 날, 1층에서 즐거운 소식이 들려왔다. 염여사가 예약해 두었던 고가의 악어백이 드디어 매장에 입고되어 매출 펀칭이 이루어진다는 소식. 그렇게 목표를 초과 달성하며 5월은 해피하게 마무리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은 현충일 무렵... 염여사에 대한 새로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염여사가 공항에서 체포되었답니다."
"아니, 왜?"
"왜?"
"사기 사건으로 수배 중이었답니다."
몇 년 전 다른 도시에서 많은 돈을 빌리고 갚지 않은 채 증발한 상태였는데, 공항 로비에서 우연히 피해자 중 한 명에게 발각되었다 했다. 그녀가 들고 있는 악어백이 남의 이목을 끌었던 것이다. 악어백만큼이나 특별한 그녀의 인생스토리가 매장에 살을 붙여 나갔다.
지방의 한 도시에서 인테리어 소품 가게를 운영하던 그녀는 꼼꼼한 솜씨와 다정한 성격으로 동네 이웃들의 신망을 얻었다. 사업 확장을 위해 지인들로부터 꽤 많은 투자를 받았는데, 결국 컨설팅을 해준다고 접근한 다른 놈들의 먹이가 되었다. 돈도 잃고 사람도 잃은 그녀는 결국 야반도주를 감행, 그렇게 시작된 떠돌이 생활 중에 우리 동네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외곽의 한 모텔에 자리를 잡고 기분전환을 위해 들른 목욕탕에서 그녀의 운명은 다시 바뀌게 되었다.
목욕탕의 터주대감 손님들이 간식을 나눠먹고 있는데 물심부름도 하고 하면서 안면을 트게 되었다. 워낙 겸손하고 다정한 태도를 가진 그녀는 금방 그들의 좋은 동생이 되었다. 자신을 재일동포 사업가로 소개하고, 우리나라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고 준비 중이라고 포장했다. 목욕탕의 단골들은 돈 많은 교포 사업가가 별 것 없는 동네 목욕탕을 이용한다는 것에 감탄했고, 시간을 내서 때도 밀어주고, 음료도 사는 그녀를 신뢰하게 되었다. 모두가 그녀의 이야기를 믿어주었고, 할 일 없던 그녀는 하루 종일 목욕탕 손님들의 시중을 들었다.
이렇게 시작된 인연은 목욕탕 밖에까지 연결되었다. 목욕탕 멤버의 경조사에 참여하여 도왔고, 쇼핑을 하거나 골프장에도 동반하였다. 음식이나 명품 브랜드에 대한 그녀의 식견에 모두 감탄하였고, 젊고 능력 있는데 겸손한 사업가로 확고히 인식되었다. 그녀도 이제 떠돌이 생활을 정리하고 이 도시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반면, 수중에 가진 자금은 거의 고갈되고, 마땅한 일자리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어떤 불행은 미세 먼지처럼 스믈거리며 다가온다.
평소 그녀를 이쁘게 여기는 언니의 쇼핑을 돕기 위해 백화점에 동반한 날, 그녀의 취향에 딱 맞는 신상 핸드백이 눈에 띄었다. 그 상품 앞을 떠나지 못하는 그녀에게 언니가 구매를 권유했다. 마침 현금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카드는 일본에서 쓸 수 있는 것만 있고, 한국에서는 아직 만들지 않았다고 둘러댔다. 그녀에게 호의가 가득한 그 언니는 자신의 카드로 결제하며 그동안의 친절에 대한 선물이라고 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선물이었지만, 그다음에는 카드를 빌렸다. 다음엔 다른 사람에게 현금을 빌려 카드 대금을 입금했다. 그리고 명품 가방을 팔아 빌린 돈을 갚았다. 돈과 카드를 번갈아 빌려가며 실적을 높이자 백화점 쪽에서 반응이 왔다. 매장 매니저들이 편법을 동원해 가며 포인트를 올려주었고, VIP 담당자가 인사를 하러 왔다. 그녀는 구름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늘어나는 부채에 정신을 차리고 다른 도시로 떠날 궁리를 했다.
마지막으로 들른 목욕탕. 새로운 이웃을 소개받았다. 다른 백화점 VIP였다. 그분을 지렛대 삼아 자가용 발렛 스티커를 요구하며 자연스럽게 백화점 스위칭을 했다. 단골 백화점을 바꾼 이유는 이쪽이 명품 라인이 강하다는 것으로 소문났다. 이쪽 백화점 명품 매니저들 사이에 경쟁이 시작되었다. 이미 다른 백화점에서 진 빚이 있으므로 빠른 시간 내에 현금을 챙겨 달아나야 했다. 단가가 센 상품 위주로 주문을 내고 약간의 신비스러운 존재로 포지셔닝했다.
떠나야 하는 데 떠나지 못하는 만큼,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란 불안감도 있었다. 갚아야 하는 돈의 총액을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우연히 매장에서 본 억대 악어 가방. 그것을 마지막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그 상품은 이미 예약한 고객이 있어 대기해야 했다. 몇 년째 이 백화점 매출 1위라는 김 여사를 위해 준비했다 하니 괜한 경쟁심도 들었다. 그 가방을 꼭 갖고 싶었다. 살고 있는 원룸의 보증금도 빼고 해서 어렵게 버티며 그날만을 기다렸다.
은행에 문제가 있어 일본으로부터 자금이 안 들어왔다고 둘러대고, 목욕탕에서 처음 만났던 언니의 카드로 결제했다.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 대충 정리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국내선은 신분증 검사가 엄격하지 않아 쉽게 통과할 수 있다 생각했으나 엉뚱하게도 가방을 알아본 사람 때문에 체포된 것이다.
그녀의 스토리는 그렇게 끝나지만, 피해자가 몇 명인지 모른다. 현금을 떼인 사람, 카드 할부가 남아 있는 사람, 가족들에게 창피해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 소문이 꼬리를 물고, 그녀의 과거 전력이 우리가 아는 수준을 넘는다고... 전과 수십 범의 전문 사기꾼이라고.... 그렇게 어수선한 시간이 흘렀다.
어울리지 않게 촌스럽게 친근한 외모가 모든 범죄의 시작이었다고...... 피해자들은 증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