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사람

지나간 시간

by NIL

6월 중순의 월요일. 주말 행사가 끝나고 매장엔 손님의 발길이 뜸하고 직원들도 대부분 쉬는 날이다.

팀장은 혼자 앉아 하반기 영업 전략을 수립 중인데 해가 갈수록 힘들다. 하고 싶은 일보다 해본 일이 많다고 할까. 하반기 영업 환경과 패션 트렌드를 살피고 전체적인 방향성을 몇 가지 끄적거렸다. 내일 직원들과 토의하면서 실현 가능토록 만들고 세부 계획을 정리해야 하기로 마음먹고 잠깐 허리를 펴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그럴 리가요. 그 직원이 고객과의 약속을 무시할 직원이 아닌데요!"

젊은 여성 고객이었다. 5월에 진행한 에코백 증정 행사 때 조기 품절로 받지 못한 가방을 오늘 주기로 해놓고 담당 직원이 쉰다는 불만이었다. 오늘 드리기로 약속했다면 분명 누군가에게 전달해 놓았을 테니 알아보고 전화드리겠다고 했지만 고객은 막무가내였다. 심지어 막내 직원이 자기가 오늘 쉬는 날이라 고객상담실에 맡겨 둘 테니 거기서 찾아가라는 건방진 문자를 보냈다고 분개하고 있었다. 그깟 몇 천 원짜리 에코백 받으려고 자기는 멀리서부터 힘들게 오고 있는데, 담당 직원은 펑펑 쉬면서 9층까지 올라가서 찾아가라니, 직원의 건방짐이 하늘을 찌른다고 목청을 높였다.


"고객님. 매장에 오셨습니까?. 그럼 제가 상담실에 들러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전화받는 사람이 팀장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더 화를 낸다. 직원 교육 운운하며 팀장이 직접 처리하겠다니 이번 한 번은 봐주겠다고 하면서 30분 후에 1층 안내데스크에서 만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점심 식사 후 테이크아웃 커피 한잔씩 들고 들어오던 직원이 멈칫하며 격렬한 통화 내용을 듣고 있었다. 팀장님이 받으면 안 되는 전화였다. 사은품 전달하고 쌩 돌아오면 될 일에 팀장이 나섬으로써 복잡하게 꼬일 것이라는 예감이 확 올라왔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사실 제가 막내에게 들은 바가 있어서, 마음 단단히 먹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손님은 사은품 행사 당일에도 담당 직원을 꽤 괴롭혔다는 전달이었다. 백화점이 나눠주는 에코백은 세 가지 색깔이었다. 그중 초록색이 가장 인기가 좋아 조기 품절되었다. 대부분의 고객은 아쉬워하면서도 다른 색 가방을 받아갔지만 그분만은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고객을 우롱하는 거예요. 초록색을 준다고 해놓고, 빨간색을 주는 게 말이되요. 이렇게 준비가 부실해서..

실물은 또 왜 이리 후져. 사진빨이야. 사진 보고 맘에 들어서 멀리서 일부러 이거 받으러 왔는데... 저기 진열품이라도 내놔요."

"어휴.. 더러워... 며칠 동안 전시해 놓고, 먼지 투성이인걸 가져가라는 거야. 거기 흰색으로 줘 바요.. 이건 모 이래. 내용물이 다 비치겠는데... 뭐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어... 높은 사람 불러봐요... 내가 당신들 알바들하고 무슨 얘기를 하겠어요. 높은 사람한테 말해야 확실하게 책임지고, 이거 만든 놈들 다 잘라버려야지"


현장에 있던 막내 직원이 다가갔다. 아래위로 직원을 훑던 고객이 스스로 해결 방안을 내놓았다.

"내가 힘들게 백화점까지 왔으니, 일단 흰색과 빨간색 하나씩 가져가고요. 초록색은 입고되면 알려줘요. 그리고 오늘 물건이 없었던 것은 당신들 책임이니 그것 받으러 오는 날. 교통비는 따로 챙겨줘요."

"나이도 어려 보이는 게 신입사원 같아서 이 정도로 끝내니까 그렇게 알아. 당신 일처리 두고 볼 거야. 높은 사람 만나서 당신 징계받게 하려다 내가 참는 거요. 알았으면 에코백 준비 잘해요."


그 후로 매일 독촉 전화가 왔다. 막내는 초록색 가방을 구하려고 전국 모든 점포에 수소문했지만 아무도 내놓지 않았다. 행사 기간 중에 인기 많은 상품을 내놓을 바보가 없다는 것을 몸으로 알았다. 행사가 끝나고 다시 일주일이 지난 후에야 초록 에코백을 구할 수 있었다. 운 좋게도 환불 고객이 사은품 현물 반납한 것이다. 포장도 뜯지 않은 최상의 상태 그대로. 이렇게 양심적인 고객도 있었다니. 안도의 한숨과 함께 자신 있게 고객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런데 고객이 하필 월요일에 온다니. 정말 중요한 가족 모임이 있는 날인데.


쓰고 또 지우고, 다시 쓰고, 고객에게 어떤 말로 양해를 구해야 할지. 미리 준비해 보지만 도저히 직접 통화할 자신이 없어 문자를 남겼다. 전화하면 고객과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최대한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는 문자를 남겼다. 문자를 읽은 고객이 반응이 없다. 불만이 있으면 분명 즉각 전화기에 불이 날 텐데...

전화가 없다는 것은 문자 내용을 이해했다는 것이라 생각하고, 상담실과 사무실 직원들에게도 장문의 메일을 남겼다. '매우 예민한 고객이니 절대 조심할 것. 한 번 물리면 죽을 수도 있음.'


여기까지 듣고 난 팀장은 후회했다. 절대 받아서는 안 되는 전화였다. 그렇다고 지금 물러설 수도 없다. 진실된 응대와 섬김의 마음은 어떤 고객이라도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고객 컴플레인을 처리하는데 솔선수범하는 팀장의 모습을 보여주기로 했다.


"근데, 고객 상담실에서는 그 고객 알더라고요. 여러 번 컴플레인이 있었나 봐요. 경쟁 백화점 직원인데, 여기 와서 스트레스 해소하고 간다고. 지가 지 매장에서 당한 대로 돌려주고 간다고. 그러고 다닌데요."


차라리 안 들었으면 좋았을 정보까지 들었다. 그렇다면 더 물러설 수 없다. 진정한 고객 감동이 무엇인지.

꼭 보여주겠다는 다짐으로 칫솔을 들고 양치하러 갔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세상의 모든 아줌마들과 맞짱 뜨던 사은품 담당 시절, 그 후 10년 만에 나타난 강한 고객. 마음이 설레었다.


그녀는 당당했다. 170cm 정도의 키에 약간 비만 체형이었다. 단정한 단발머리에 코로 흘러내린 안경을 중지 손가락으로 끌어올리며 다가왔다. 입고 있는 청바지가 더워 보였다. 샌들을 헐겁게 조였는지 딸깍거리는 발소리가 신경 쓰였다. 준비한 에코백을 전달하자 그녀의 질책이 시작되었다.


"중요한 건 이 따위 가방이 아니라, 생각 없는 직원의 무례에 대한 팀장님의 진심 어린 사과 아니겠어요"

직원의 실수와 고객의 정신적 피해까지 고려하여 사과했다. 알고 있는 가장 가장 정중한 표현으로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고객의 마음을 살폈다. 우리 직원이 잘못했다 생각하는 고객을 이해하자고 스스로를 세뇌했다.


"사과를 제대로 하셔야죠. 무릎 꿇고 진정으로. 무엇을 잘못했는지 말씀하셔야죠. 어떻게 보상할 것인지도 설명해 보세요. 제가 됐다고 할 때까지 일어나지 마세요"


백화점 이미지나 서비스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여자는 미친 여자였다. 팀장은 갑자기 궁금했다. 이 미친 여자가 어디까지 갈 것인지. 그 끝을 보기 위해 가볍게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주변 매장의 웅성거림에 화장품 담당 대리가 달려왔다. 한 편의 연극을 상연 중인 팀장에게 다가와 일으켜 세웠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팀장님!. 직원과 고객들이 다 보고 있어요. 고객님! 일단 사무실로 가시지요!"

장소를 옮겨 백화점 앞의 커피 전문점. 그녀는 말차라테를 시켰다. 왠지 너무 달아서 신경질 에너지를 더 돋울 것이 불안했다. 실내에는 휴식을 위해, 또 다른 고객을 만나기 위해 나와 있는 백화점 직원들이 많았다.

백화점 앞으로 온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랑곳없이 다시 사과를 요구했다. 매장이 시끄러워서 잘 듣지 못했다 했다. 다시 한번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했다.


이번에는 작전을 바꿨다. 무조건적인 사과보다는 그녀를 설득해 나갔다. 처음 에코백 행사 준비부터 오늘의 상황까지 단계별로 짚으며 직원의 실수와 고객의 정당성을 확인했다. 이야기에 빨려들며 그녀가 점차 누그러지는 태도를 보였다. 역시 교과서대로 고객의 이야기를 잘 듣고 공감해 주면 모든 컴플레인은 해결될 수 있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그녀대로 모든 순간을 계속 복기하고 있었다. 그렇게 두 시간이 흘렀다.


그녀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안경너머 빛나는 눈빛은 총명하고 예의 바른 청춘의 표정이었다. 팀장은 흐뭇했다. 두 시간의 대화가 그녀의 정신을 치료해 준 것이다. 삶이 힘들다 말할 친구도 없는 고객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줘 그녀에게 평온을 줄 수 있다면 에코백 100개도 아깝지 않으리라.

그런데 고객이 갈 생각을 안 한다. 아직도 미진한 것이 있나. 혹시 막내에게 직접 사과를 받고 싶은 것인가.


"그럼, 주셔야죠. 백화점의 실수로 제가 여기까지 왔으니까. 교통비 주셔야죠."

"아.. 그거요.. 그게 죄송하지만 저희 백화점에도 절차가 있어 사건처리 보고서를 작성하고 고객님께서 서명을

해 주셔야 합니다. 아무래도 회사 비용이 나가는 일이라 증빙을 남겨야죠. 저희 직원에게 서류를 가져오라 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일상적인 행정처리 안내에 고객이 다시 갑자가 돌변하며 발작했다.

"이 아저씨가 누굴 거지로 알아. 당장 사과하세요. 방금의 그 모욕적인 언사. 내가 그깟 교통비 몇만 원에 목매는 년으로 보이나 보네. 당신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 성희롱이야. 내가 여자라고 우습게 보고 "


그 담에 어떻게 끝냈는지 기억이 없다. 상담실 직원이 와서 현금 2만원 주고 동일 건으로 다시 컴플레인 제기하지 않겠다는 서류에 사인받았다.고객은 처음부터 그것이 목적이었던양 만족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상담실 직원이 팀장을 위로했다. 너무 오랜 시간 수고하셨다고.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다고 지나친 친밀감을 보이거나 고객의 심리를 테스트하려는 자세를 보여서는 안 된다. 그 순간 고객도 자신이 테스트받는다는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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