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성인이 된 지 한참 지났다. 지금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그 나잇대 내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드문드문 기억날 정도다. 눈에는 띄지 않게 나댔던 거 같다. 친한 무리라고 해봤자 서너 명 되지도 않는 아이들 틈에 껴서 한 사람이라도 더 웃겨보겠다고 제법 말할 때 힘을 주었다. 사실은 하나도 힘주지 않은 것처럼 내뱉었겠지만. 내 이야기에 웃어주는 친구가 있으면 그게 너무 좋았다. 어쩔 땐 숨을 쉬는 게 힘들 정도로 소리도 안 내고 웃은 적이 있었다. 그렇게 친해진 친구들이 지금도 종종 그때 이야기를 하며 웃는다.
별 것도 아닌 이야기로 한 번 왁자하게 웃고 나면 하지도 않은 공부와 입시 스트레스를 피하기에 제격이었다. 독서실에 가서 영어 단어를 검색해야 할 피엠피로 웃긴 코미디나 예능을 봤고 자기 전엔 인터넷 소설을 읽었다. 두어 달간은 아이돌을 덕질하기도 했다. 그때 덕질했던 가수는 지금 꽤 건강한 행보를 보여주어 조금 고마운 마음이 든다.
입시에 열정은 없었지만 나름대로 뜻은 있었던 모양인지 이래저래 돌아서 대입을 치렀다. 결국 학생 때보단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새로운 공부를 할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남들 눈에 너무 후져 보이지 않는 정도의 타이틀만 얻었음 된 거라 생각하며 그냥저냥 몇 년을 흘려보냈다.
와중에 글에 대한 마음은 미온하게나마 있었는지 꾸준히 낙서를 하고 짧은 사유를 끄적였다. 한때 자신의 감정을 글로 쓰는 사람들을 진지충이라 여겼던 문화가 있었다.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진 건 없어 보이지만 예전엔 좀 더 심했다. 그 또한 남들의 시선이었기에 난 적당히 받아들여질 만한 글만 썼다. 완전히 솔직한 생각도 아니었지만 지지받고 공감받을 수 있을 내용만 진심인 것처럼 썼다.
더 자라면서는 남들을 웃기려는 욕망이 사라졌고 조용해졌다. 아니 사실 생각해 보면 중학교 때까진 조용했을지도 모른다. 반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던 아이. 난 내가 교실 창문에 달린 커튼이고 사물함 위에 놓인 주전자라고 종종 생각했다. 그것만으로도 크게 나쁘지 않았다. 어떤 누군가의 타깃이 되는 것보단 그 편이 나았으니까. 적당한 유머로 옆에 있는 친구 몇을 웃겨 놓고 제법 조리 있어 보이는 말들로 상대의 환심을 사고 나면 그래도 반에서 가장 음울하고 답답한 아이는 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 아이는 곧 따돌림의 대상이 되거나 완전한 무관심 또는 은근한 무시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니까. 그것만 피하면 되는 시절이었다.
고등학생 땐 그렇게 조금씩 갈고닦은 말솜씨로 눈에 띄지 않고 나댈 수 있는 방법을 배웠고 친구를 사귀는 방식이 조금 더 세련된 반면 조금 더 냉정해지기도 했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적어도 우리 반은, 누구를 대놓고 괴롭히거나 따돌리는 일은 없었지만 티 내지 않아도 은근히 무시하기 좋은 친구는 있었다. 이런 건 왕따도 아니고 피해자도 아니었다. 그냥 딱히 친구가 없는 애. 어디에도 단짝이 없는 애. 조금 답답한 애.라고 설명하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그 애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조금씩 피할 수 있었고 귀찮은 일은 각자 자기에게만 떨어지지 않으면 될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학교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중학생들은 어른의 보호도 받기 싫어하고 훈계는 더더욱 듣기 싫어한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중학생 시기엔 자기 자신이 어딘가에든 크게 영향을 끼질 수 있는 존재인지 아닌지 가늠하고 싶어 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말이다. 어떨 때는 그게 너무 안달이나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르기도 한다. 똑같은 학년이 되어 똑같은 교복을 입고 똑같이 한 반에 앉아서 서로를 탐색한다. 그러다 본능적으로 느낀다. 누군가는 함부로 말을 걸 수 없는 애가 되기도 했고 누군가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애였으며 또 누군가는 내게 말을 걸어주었으면 하는 애였다. 그리고 누군가는 착할 것 같지만 옆에 앉기 싫은 애. 답답한 애. 왕따가 될 것 같은 애. 가 되었다.
그것부터 빨리 파악하는 게 중학교 생활의 시작이었다. 누가 내 친구가 될지 누구와는 일 년 동안 단 한 번도 얘기조차 하지 않게 될지. 그 시기엔 그냥 본능으로 알았다. 어쩌면 미리 알고 있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누군가는 나를 보고 적어도 왕따가 될 것 같은 애.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면 했다. 정말 죽어도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걸 피하기 위해선 단짝 친구를 만드는 게 필요했고 함께 다니기 힘들지는 않아야 했기에 적당히 성향이 맞는 친구여야 했다. 매일매일이 보이지 않는 전쟁이었다. 오늘 친했던 아이가 무슨 이유에선지 다음 날 영문도 모른 채 멀어져 있기도 했고 친해졌다고 생각해 내밀한 이야기를 터 놓았던 아이가 다른 친구들 앞에 내 이야기를 웃음거리 삼아 떠들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나와 친한 친구가 수적으로 더 많지 않으면 그런 것도 못 본 척 지나갈 수 있는 가식을 부려야 했다.
모두 배려가 없던 시절. 모두 각자의 전쟁을 치르며 왕따가 되지 않기 위해,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했던 시절. 모두가 아마 힘들었을 시절.
난 그렇게 생각했었다. 모두가 힘들었다고. 힘들었을 거라고.
내가 치러 온 조용한 투쟁이 힘든 축에는 속했을 거라고. 교실 창문에 달린 커튼이고 사물함 위에 놓인 주전자였던 나도 아니 어쩌면 그래서 더 힘들었을 거라고. 그러니 교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던 아이들은 아마 더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요즘 유명인사들의 학교폭력 논란이 뜨겁다. 그들도 그 시절을 거쳤겠지. 말도 안 되는 짓을 해도 시간이 눈을 감아주던 그 시절. 중학교 혹은 고등학교. 학교폭력 논란이 사실이라면, 피해자가 명백히 존재하고 피해사실이 명백히 있었다면, 가해자들은 그 시절을 어떻게 기억할까. 힘들었다고 기억할까? 재밌었다고 기억할까? 아니면 이제 와서 본인들 인생에 흠집 나는 상황을 못 견딜까?
오랜 시간 외면만 해 오던 인간들에게 진짜 반성이란 가능할까.
모두 배려가 부족했고 방식은 다르지만 서로에게 폭력적이던 학교에서 정말 폭력의 희생자가 됐던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너무 많이 아팠을 거라고… 어쩌면 방관자였을 수도 있던 내가 미안하다고, 그리고 고생 많았다고. 앞으로 남은 시간만이라도 혹시 어떤 자책도 비관도 하지 말고 안녕히, 부디 안녕히 지내셨으면 좋겠다고.
학교폭력 희생자들과 그들을 아끼는 모든 분들이 조금이라도 평안해졌으면 좋겠다. 모두가 힘들었을 거라고 착각했지만 사실 힘들었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간을 견뎌내 왔을 피해자들 앞에서 공연히 숙연해진다. 혹시 내가 가해 입장에 서 본 적은 없었을지도 되짚어봤다. 누군가를 알게 모르게 상처 입힌 적은 없었을지. 누가 별것 아닌 나 때문에 힘든 적은 없었을지. 부끄럽지만 내가 기억 못 하는 것은 아닐지.
그 시기를 어떻게 기억할지는 가해자들에게 남겨진 숙제가 될 거다. 제발 아무도 즐거웠다고 하지 않길 바란다. 그런 가해자가 있다면 가장 큰 저주가 내리길 기도한다.
(요즘 드라마 학교 1-4시리즈를 보고 있다. 90년대 작품인데 아주 정직하고 좋은 이야기들을 담았다. 물론 그 시대 때 피할 수 없는 시대착오적 편견이 담긴 대사도 있지만 그 마저도 비판하는 목소리의 캐릭터들도 나온다. 학생들을 다뤘던 드라마인 만큼 쓸데없이 자극적이지는 않도록, 하지만 현실적인 고증은 담기도록 쓴 흔적이 보인다. 아 참, 조재현(학교 3 담임으로) 고 조민기(학교 4 담임으로) 배우도 나온다. 역겨웠다. 어떻게 둘이 같은 시리즈에 나오는지도 소름 돋는다… 이 좋은 작품을 대체 왜 망치고 있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