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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자 Nov 06. 2016

스물 네번째 잔 - 내가 아는 대한민국 청년들

꿈은 사치재, 시간이라는 대출상품


최근 박종훈의 <대담한 경제>라는 책을 읽었다. 제목에 노골적으로 나와있는 ‘경제’라는 단어만 보고 나와 친하지 않은 수치, 통계 같은 것들이 즐비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가독성이 좋아서 다행이었다.

     

상속세,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대치, 부자들의 사고체계 등 여러 주제로 테마를 나누어서 설명을 해놓았는데 그 중에 가장 관심이 갔던 건 ‘청년’과 관련된 테마였다. 저자의 생각은 명확했다. 철저하게 이 시대의 청년들의 고충을 들여다보려하는 입장이었다.



올해 청년 실업률이 11년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한다. 수치에만 완전히 의존할 순 없지만 ‘최고치’라는 단어는 아마 내가 피부로 느끼는 현실에서의 정도보다 오히려 더 순화된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만큼 현재 청년들의 취업난은 상상을 초월할 수준이다.


그런데 간혹 누군가는 청년들에게 ‘눈을 낮추라’고 한다. 중소기업에도 얼마든지 자리는 있고 생산직, 소위 말해 3D업종 계열에도 자리는 넘쳐나는데 청년들이 주제넘게 극구 대기업, 공직계열, 편한 일자리만 노리다 보니 그런 것 아니냐는. 일단 뭐라도 해서 (계약직 입사라든가) 돈을 벌고 나중에 정규직으로 지원을 하거나 창업을 해보는 건 어떠냐.


초기 헨리포드나 노키아도 망하는 게 창업이고 정규직 전환 계약직이 몇년 기한인 줄 알기나 알까.

     

박종훈 기자는 이는 결코 청년들의 눈높이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봤다. 당연하다 사실. 청년들이 뭐 얼마나 눈들이 높다고 원하지 않는 곳에 가는 것보다 백수를 선택하겠는가. 눈이 높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열악하기 때문이다. 도저히 눈을 낮출래야 낮출 수 없을만큼 그 곳은 열악하기에.



사실, 힘이 좀 더 들고 근무 시간이 더 많은 직종일수록 급여는 올라야한다. 심지어 청년들이 기피하는 일자리라면 급여를 더 높여서라도 구인을 해서 취업난을 해결하는데 일조해야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기업들의 급여가 요지부동인 이유는 청년들과 기싸움을 하느라 그렇다고 본다. ‘굳이 너희들 없어도 회사 잘 돌아간다. 급여를 낮게 받고도 일 할 외국인 노동자가 있으니 비싼 돈을 들여서 너희들을 모셔오기 싫다.’ 열악하다.

     

외국인 노동자와 우리나라 청년들의 상황은 확연히 다르다. 그들은 타국에서 돈을 단기간안에 벌고 고국으로 돌아가면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삶을 영위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우리나라 청년들은 이 땅에 태어나서 이 땅이 주입했던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이 땅에서 번 돈으로 이 땅에서 결혼도, 육아도, 노후도 준비해야한다.

     

이런 상황에서 눈을 낮출 수가 있을까 과연?

     

고스펙을 요구하는 세상에서 그에 맞게 어느정도 올라왔다 싶어도 여전히 바늘구멍인 공간으로 몸을 비집고 있는 게 현 청년들의 모습이다. 아무리 살을 빼고 또 빼도 몸집이 비대한 건지(눈을 낮추라 했던 그들의 말대로), 구멍이 작은건지 도대체가 들어가지질 않고 11년만에 취업난은 최고치를 찍었으며 포기는 배추 썰 때나 하는 말이라던 응원가를 부르던 세대가 이젠 N포세대가 되었는데?

     

눈을 낮춘다고 나아질까 이게?



내가 생각하는 우리나라 청년들은 참 대단하다. 영어에(심지어 제3외국어까지), 주전공과 복수전공으로 보내는 대학 n학년, 각종 자격증과 작가 뺨치는 글빨로 써낸 자소서, 거기다 수없이 많이 경험한 면접까지.

     

AI가 따로 없다.

     

그럼에도 우린 이 땅에서 알파고보다 인정받지 못할 알고리즘을 갖고 있고 취업난은 여전히 최고다.

     

늘 돌아오는 상반기, 하반기 취업시즌. 일관되게 돌아오는 계절보다 못한 취업률. 주입식 교육과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질문 하나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경직된 수업 방식. 학점따기식 대학생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늘어만 가는 주변의 눈초리들.(취업해야지 않니, 돈 모아야지, 결혼은 집은? 등등)

     

청년의 꿈은 사치재가 된지 오래다.

luxury란 단어가 우리의 형체 없는 ‘꿈’에도 붙을 줄은 몰랐다. 모순 덩어리의 주체들이 말하는 젊었을 때 사서 하는 고생, 지금이 아니면 꿀 수 없다고 던져주듯 말하는 꿈에 대한 열망은 일단 나중에, 돈 부터 벌고 라는 시간의 '무기한 대출'이 아니면 절대 살 수 없는 사치품이 됐다.


여전히 빼액거린다. 빼액거리는 사람은 많다. 결국 빼액대도 뭐가 바뀔진 모르겠지만 건강한 청년의 마인드가 점점 어긋나지 않게, 그들의 능력부족을 탓하기 이전에 정말 부족한지 검증이라도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와주길 바라도 될까.


앞으로 미국 대선 당선자에게 전화 한 통 돌릴 여유도 없으실 상황일텐데 뭐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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