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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자 Nov 14. 2016

스물 다섯번째 잔 - 은희경 <태연한 인생>을 읽고

참 무서운 작가라는 생각이....

은희경 <태연한 인생>

     

읽자마자 이 작가 정말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한 권 쓰고 나면 앓을 것 같다. 어쩜 생각을 이리도 깊게 굵게 잘 하는지 생각이란 분야에 정통한 전문가 같았다.

     

이 책은 구성적인 면에서 엄청 잘 짜여진 느낌도, 스토리상 줄거리를 나열하기 쉬운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냥 떠오르는 감정, 감정들을 지리멸렬하게 써놓은 느낌이었고 사라지게 나둬도 모나지 않을만한 생각마저 산발적으로 옮겨놓은 느낌이었다. 다시말해 누구나 살다보면 한번쯤은 당연하게 느꼈을법한 그저그런 감정들. 하지만 결코 가볍게 지나칠 수는 없을 만한 감정들이 책 전반에 깔려있었다.

     

주인공은 류와 요셉. 그 외에 주인공이 됐을 법도 한 인물들이 몇 나온다. 이채, 도경, 류의 아빠와 엄마 등. 인물들은 모두 자신들이 살아온 스토리보단 성격적인 측면에서 더 부각됐다. 소설은 류의 엄마 아빠가 처음 만났던 장면으로 시작한다. 류의 아빠는 류의 엄마가 공중전화에서 사귀던 남자에게 전화를 거는 모습을 보고 첫 눈에 반했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빠졌다. 류의 아빠만이 볼 수 있었던 그녀의 매혹. 그렇게 평생을 정갈하고 품위있게 사는 그녀에게서 자신에게는 없는 알 수 없는 매혹의 빛을 본 것이다. 틀이 많은 여자. 자존심이 세고 감내할 것이 많은 여자. 그녀는 참 외로운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에 반해 류의 아빠는 느낌이 가는대로, 감정이 시키는대로 자유롭게 사는 인물이었다. 어떤 틀에 얽매이지도 않고, 애인이 있는 여자에게도 자신의 호감을 가감 없이 표현할 수 있는 꽤 솔직하고 용감한 사람이었다. 그 둘의 만남이 공중전화 부스 안과 밖이라는 경계 사이였던 것처럼 둘의 모습 사이에도 몇 발자국만큼의 경계는 존재했다.



그렇게 조금은 다른 둘의 모습을 작가는 이렇게 표현했다. 어머니와 아버지에게서 ‘류’라는 이름을 짓게 된 서로 다른 이유를 듣게 된 부분이다. <어머니가 가르쳐준 것이 과학자나 철학자들이 밝혀내려고 했던 세상의 정돈된 이치였다면 아버지 쪽은 매혹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매혹은 아버지의 기질이 그렇듯 태생적으로 무책임하고 이기적이었다.>

     

이렇게 작가는 둘 성향의 차이를 통해 인간사에 존재하는 어떤 ‘틀’을 깰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소설 전반에 ‘틀’, ‘고독과 고통’이라는 단어가 종종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아마 이 부분에 많은 초점을 기울인 게 아닌가 싶다. 보통내기의 생각으로는 인간에게 있는 ‘틀’을 각 인간의 성향차이로, 사랑차이로, 겉모습과 속모습 차이로 묘사해내기 힘들 것이다. 여기서 작가의 노련함이 보이는 것이다.


또한 작가는 인간에게 존재하는 ‘틀’을 인간의 이중적인 모습을 통해서도 맛깔나게 묘사해냈다. <또 지식인으로서는 정의로운 사람도 정서적으로는 편견투성이었으며 평등을 주장하지만 자신이 아는 사람들과 평등해지기는 싫어했다. 많은 기자들은 제 주변에서 일어나는 몇 가지 사례만으로 자기의 편견을 일반화할 뿐이지만 전문가들은 더 나아가 거기에서 규칙을 발견해내서 자신의 신념체계로 대중을 속이기를 좋아했다.>

인간에게 있는 이중성. 좋은 사람이 되고싶지만, 연민과 동감의 능력을 타고나지만 절대 버릴 수 없는 본능적인 우월함에 대한 갈망의 ‘틀’. 그래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인간사의 서열관계, 은연중에 드러나는 우월감, 무의식중에 느껴지는 화끈거리는 열등감, 인간사의 카테고리를 뛰어넘을 수 없는 최대의 피해자는 인간이라는 존재였다. 이렇게 작가는 인간에게 있는 본능적인 상하관계, 우월과 열등의 틀을 우리 모두의 생각의 골을 핥듯이 표현해냈다. 한 번쯤은 누구나 맛 보았을만한 보편적인 생각을 덤덤하고 결코 날카롭지 않게 토해낸 것이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 부끄럽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했다. 어쩜 이렇게 다 긁어낼까. 물론 내 나이와 경험, 나만의 고유성이라는 한계에 갇혀서 작가의 생각을 모두 다 따라갈 수 없던 부분도 있었다. 동의하고 싶지 않은 부분도 물론 있었고. 그렇지만 결국 난 그녀가 굉장히 똑똑한 여자라는 생각을 했다. 무섭게 똑똑하다. 정말.



책을 읽는 중에 내게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인물은 류의 엄마도 류도 아닌 도경이었다. 그녀는 천진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냥 헤벌쭉, 어찌보면 바보같기도 했고 다르게 보면 천박해보이기까지 했다. 물론 요셉의 시선으로 본다면. 하지만 그녀는 어떤 상황에도 흔들림이 없었고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다. 결코 그녀의 마음 속 패턴을 읽을 수 있던 사람은 없던 것 같았다. 요셉도 나름 자신의 생각대로 그녀를 정의내리고 있었지만 절대로 그녀 위에 정신적으로 군림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요셉이 도경의 천진난만한 도발에 놀아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란 생각마저 들었다. 도경은 마음 관리를 아주 잘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휘둘리지 않는 아주 아주 순진무구하고 천진할뻔한 여자였으니까.

     

사람을 읽어내는 기술을 능력처럼 여기며 희열을 느끼는 요셉은 왠지 이 책을 다 읽고나면 이 소설의 최대의 피해자가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요셉은 도경에게도, 류에게도 어쩌면 이용당한 먹이사슬의 가장 아래단계에 있던 초식계 동물이 아니었을까.

     

류는 결국 요셉을 떠났고, 어떤 언질도, 돌아오겠다는 전보도 없이 넋을 놓게끔 해놓고 사라졌다. 류 또한 굉장한 머리를 지닌 것 같은 게 잊히지 않는 법을 잘 아는 사람 같았다. 소설처럼 사는 법을 아는 사람. 자신의 엄마처럼 모든 걸 감내하고 굳건하게 살 수도, 자신의 아빠처럼 느낌 가는대로 대책 없이 살 용기도 없어서 곁에 붙어있던 것들을 훌훌 내려놓고 그냥 사라질 수 있는 매력은 지닌 여자였다.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사랑의 앞에서 겁이나 결국 고독을 선택한 그녀. 결코 요셉에게서 잊을 수 없는 향기를 뿜고 간 것이다. 아무 말도 없이 떠나간 것이 바로 그 향기였다. 인간에게 있어서 찌질함도 매력적인 향기가 될 수 있다는 걸 언뜻 느끼게 된 부분이었다. 사람이 목숨까지 내바쳐서 얻고 싶어하는 그 ‘궁금함’이라는 키워드를 심어주고 간 것.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꽤 매력적이고 똑똑했다.



하지만 좀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똑똑하게 사는 것과는 별개로 편하게 살고 싶지는 않았을까. 그냥 좀 퍼지고 풀어지기도 하고, 보여지는 모습보다 자연스레 보여질 수 밖에 없는 모습들에 더 많은 당근을 줬으면 어땠을까. 우린 모두 사람인데, 부족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고 찌질할 수밖에 없는 사람인데 그냥 좀 자연스러워지면 어땠을까. 사람을 만나 교제를 하고 사랑을 하는 일도 똥싸고 잠을 자고 밥을 먹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 된다면 어떨까.

     

그렇게 살 수 있는 류의 아빠, 절대로 그렇게 살 수 없는 류의 엄마. 어떤 인생이 맞는 인생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책의 제목만큼 그 둘은 모두 태연하게, 태연한 척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인 건 맞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집중하게 됐던 건, 책에 자주 등장하는 ‘고독과 고통’이라는 틀이었다. 인간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행복해지기도, 고통스러워지기도 하지만, 그리고 그러고 싶어하지만 그놈의 고통이 너무나 힘든 것을 알기에 스스로 고독을 선택하기도 한다. 어찌보면 인간에게 고독과 고통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양면적인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거대한 틀 안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인간들의 모습. 인간들의 인생. 태연한 인생이 담고 있었다.

     

난 이 책을 읽고나서 이제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까. 생각을 하는 게 답일까 오히려 생각을 지우는 게 답일까. 이 책은 어떤 답도 내주고 있지 않았다. 물음표만 엄청나게 던져줬을 뿐. 답을 내야 하는 사람은 나였고.

     

아래 두 문장은 책을 읽으면서 가장 동감하기에 불쾌했던 장면.

     

<고독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적요로운 평화를 주었다. 애써 고독하지 않으려고 할 때의 고립감이 견디기 힘들 뿐이었다. 타인이란 영원히 오해하게 돼 있는 존재이지만 서로의 오해를 존중하는 순간 연민 안에서 연대할 수 있었다. 고독끼리의 친근과 오해의 연대 속에서 류의 삶은 흘러갔다. 류는 어둠 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었다.>

     

<요셉의 아내는 뭔가 선택하는 일을 세상에서 가장 어려워했다. 누구와 사랑에 빠질지 누구와 결혼할지도 선택하기 어려워해서 요셉이 선택해준 남자와 결혼했을 정도였다. 자기 쪽에서 누군가를 좋아한다기보다 누군가 자신을 좋아하면 그것을 주어진 조건으로 알고 성실하게 반응하는 그녀가 자기 인생의 행복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행동은 그렇게 해서 같이하게 된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필사적으로 믿는 것뿐이었다. 자신의 남편이라고 해서 무조건 좋은 사람으로 믿으려 하다니 그런 점에서라면 아내처럼 낙천적인 인생관을 가진 사람을 요셉은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지나치게 천진한 낙관인 만큼 그리 어렵지 않게 깨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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