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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수정 May 04. 2019

세계를 견디는 방법

나를 비추는 작업들: 리틀 포레스트의 혜원, 그리고 가회동 집사 빈센트

<리틀 포레스트>의 혜원


<리틀 포레스트>가 힐링 무비라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자연과 요리 그리고 청춘이 생생한데 힐링이 아니면 무엇이냐고? 돌이켜 보자, 기억은 미화되니까. 치유에는 상처가 필요하다고 해도 러닝 타임 내내 다툼이 끊임없다. 휴양림 아래 누우면 눈이 감기 듯 자칫 관객들을 램수면으로 이끌 수 있는 이 위험한 풍경에 일정 주기로 박차를 가하며 스토리를 풀어내는 것이 바로 갈등이다. 조곤조곤하지만 인물들의 표정과 그걸 보고 있는 내 얼굴만큼은 세상 심각하도록 조이는 긴장감 덕분에 적당히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다.


본래 혜원이 고향으로 돌아온 이유도 도시에 거듭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냥 평화로울 것만 같은 시골에서도 크고 작은 불화가 일어난다. 갈등은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적응하는 것일까? 심지어 상대가 부재해도 그와 불화할 수 있다. 혜원은 재하와 은숙 사이에서 무심코 뱉고 들은 말들 때문에 삐걱대기도 하지만, 오래전 수능이 끝나자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엄마의 흔적을 집안 이곳저곳에서 발견할 때마다 울컥한다. 세계에 존재하는 한 불화는 계속된다.


혜원이 세상과 화해하는 방식은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이다. 먹는 것 자체만으로도 치유가 된다지만, 돌아온 시골집에서 ‘엽떡에 주먹밥 추가’를 시켜먹었다면 각본과 연출은 상당히 달라져야 했을 것이다. 오랫동안 빈 집에 남은 재료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혜원은 손수 언 눈을 헤치고 배추 밑동을 끊어 국을 끓이고 밥을 지어 말아먹는다. 요리는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함은 아니다. 혜원은 계속해서 자신의 시간과 노동과 정체성을 들여 조리하는데, 이 작업을 통해 도시에서 투명해졌던 자기 존재를 다시 선명하게 색칠해간다.



싸울 일 크게 없을 것 같은 고향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체하고 뒤틀릴 때마다 요리가 등장해 막힌 사이를 해소한다. 단단히 삐진 은숙에게 크림브륄레(들어는 봤나 크림브륄레, 풀 네임은 훨씬 길다!)를 스윽 내밀거나, 은근히, 그렇지만 정조준 해 던진 재하의 말에 뼈를 맞은 이후로 태풍에서 살아남은 실한 사과 한 알을 건네받는 식이다. 리틀 포레스트에서는 사과 한알, 배추 한 포기도 씨를 뿌리고 바람과 햇볕에 익힌 요리다.


혜원만의 화해 방식인 레시피가 엄마의 것을 닮았 듯, 혜원의 불화는 실은 엄마의 그것을 쏙 빼닮았기도 하다. 혜원은 기억 속 엄마와 끊임없이 대결하며 극복하려 하는데, 어떤 기억으로부터 엄마도 엄마의 엄마(혜원의 조모)와 지속적으로 불화해왔던 것을 알 수 있다. 돌아온 혜원을 처음 본 고모의 말처럼, 혜원의 엄마도 어떤 세상에서는 완전히 녹아들지 못하는 존재였다.


“난 네 애미만 별나다고 생각했는데, 너도 차암- 별나."


어느 회상 속 엄마는 답하기 곤란한 혜원의 질문에 대답 대신 먹던 토마토를 땅에 던지는데, 대화는 물 흐르듯 자연스레 토마토 재배 이야기로 넘어간다. 불화를 닮은 만큼, 해소하는 방법도 그렇다. 존재가 무시당한다 느껴질 때, 확인할 길이 없을 정도로 자신이 투명해졌을 때 우리는 세상과 불화한다. 혜원은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어 삶고 굽는 시간으로 만들어진, 자신이 고스란히 담긴 요리를 통해 자존을 회복해 나간다. 그렇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화해한다.




<SBS 스페셜>의 가회동 집사 빈센트


얼마 전 TV 다큐에서 혜원처럼 기와집 아래 자기만의 요리를 하는 이를 하나 더 발견했다. 그는 칠순을 내다보는 청년, 빈센트(본인은 350까지 살 계획이라 했으므로 청년 아닌가). 사먹는 음식은 재료 하나 어디서 왔는지 모르기 때문에, 먹는 것만큼은 내 손으로 하겠다는 일념 하에 매일 아침 빵을 굽는다. 물론 세상엔 없던 빵이다.


혜원에게 ‘리틀 포레스트’가 있다면, 빈센트에게는 그만의 기와집 ‘아폴로니아’가 있다. 낡은 한옥을 2년동안 손수 개조해 만든 집인데, 그리스 해안 도시(아폴로니아)를 연상케 할 만큼 이색적으로 조리했다. 한옥 아래 혜원의 크림브륄레와 양파그라탕이 떠오른다. 그가 만드는 요리도 역시 매번 평범하지 않다. 파인다이닝의 셰프처럼 자신만의 독특한 레시피를 만들어 지인에게 맛을 보여주고 피드백을 받는 것이 취미다.


<아폴로니아에서 가회동 집사 빈센트>


이외에도 혜원과 빈센트는 닮은 구석이 꽤나 있는데, 혜원이 도시에 부적응했던 것처럼 빈센트도 사회와 불화하며 갖게 된 꽤 큰 상처가 있다. 아이비리그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대기업을 다니던 빈센트는 인종차별로 인해 예상 밖의 낮은 고과 점수를 받게 되고, 이에 불복하여 시정서를 제출했지만 역으로 강제 해고를 당하게 되었다. 이후로도 회사와 기나긴 법정 싸움을 하게 됐고, 결과적으로 승소를 얻어냈지만 지난한 시간을 견뎌야만 했다. 그 기간 빈센트는 본격적으로 거의 모든 것을 손수 짓기 시작했다.


자기를 거스르는 주류를 참지 못하고 벗어날 수 있는 이들은 자존심이 강한 편이다. 자존심에 예민한 사람일수록 자기에 집중하기에 세계에 다소 무관심한 면이 있는데, 혜원과 빈센트 둘 모두에게서 사회성이 조금은 떨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혜원은 어렸을 적 왕따를 당한 경험이 있고, 커서는 그마저도 별 것 아닌 듯 잊고 있었기에 재하의 언급에도 전혀 떠올릴 수 없었다. 직장 상사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은숙에게는 겉치레 위로는커녕 힘들면 그만두라는 쉬운 말을 날리기도 한다. 자신을 홀로 두고 합격해버린 남자친구에게는 보름간 연락을 두절, 소위 잠수를 탄다. 빈센트 역시 투명해지기를 부정해서 징계를 받는다. 그의 부인은 소싯적 그에 대한 인상을 사교적이지는 않지만 능력 있는 이로 기억한다.



“야, 너 근데 갑자기 왜 온 거야?”

“나 배고파서 내려왔어... 진짜 배고파서...”


어떤 재료로 어떻게 조리되어 왔는지 모를 매일 쏟아져 나오는 기성식품들은 혜원에게는 설국열차의 단백질 블록과 다름 없었을 것이다. 당신이 먹는 것이 곧 당신을 말해준다고 했던가. 도시에서 혜원은 그가 먹던 편의점 도시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회가 요구하는 스펙에 맞춰 자기 삶을 재단해야 하는 현실에서 혜원은 몸의 허기도 허기지만, 존재의 허기가 심했다. 남들과 같은 것을 먹고, 남들과 같은 일을 해도, 남들만큼 살지 못하는 곳에서 자신을 찾을 길은 없었다. 공무원 고시 학원 교실에 깔린 수백 개의 책상 가운데 하나, 딱 그만큼인 존재는 편의점에 진열된 도시락과 같았다. 개인을 지우는 구조 속에서 혜원의 허기는 자존 확인에 대한 배고픔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존심 센 사람들만이 세계와 불화하겠는가.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을 뿐인 사람들이 대다수다. 자존심에 예민하지 않더라도 개인의 고유함을 쉽게 묻어버리고 마는 사회에서 버티는 일은 쉽지 않다. 세계는 고도로 전문화되었고, 개인은 거대한 생산 메커니즘의 일부인 톱니바퀴로써 언제든 교체 가능한 존재로 고유성을 잃어버리고 만다. 옷감을 선택하는 것부터 끝매듭을 짓는 일까지 스스로 작업을 완성하던 지난 시절과 달리, 현대인들은 수만 가지의 과정 중 한 단계만을 반복하는 일을 요구받는 까닭에 결과물에서 자신을 찾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반도체를 만드는 이는 스마트폰에서 자기를 발견할 수 없다.

 

자존을 확인하는 작업들이 필요하다. 몸둘 곳 없이 투명해질 때 혜원은 씨를 뿌리고, 채썰고, 데쳤다. 빈센트 역시 치수를 재고, 절단하고, 조이고, 접착했다. 땀을 들이고 기다리는 과정을 통해 얻어낸 결과물에서는 자신이 오롯이 비춰졌다. 대체 불가능한 어떤 이가 거기에 있었다. 결국 자기효능감이다. 한데 어울릴 수 없는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혜원과 빈센트에게서 어떤 유사한 청량함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들만의 방식으로 자기를 지키며 세계를 견뎌나가는 건강함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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