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하게 흘러가는 역사, 가볍지가 않다
도시의 곳곳에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잡아다 불을 피우고 그 속에다 집어던져 버린다. 그 속에서 고양이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 이 행위를 주도한 사람들은 고양이를 학살하며 즐거워한다. 누군가 자신의 고양이가 그 불길 속에 있다는 걸 알아채고 화를 내지만, 도시의 '다수'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몰랐다"는 말로 자신의 잘못을 벗어난다.
이 이야기를 지금의 혐오와 연관시키지는 말자. 이 이야기는 '거대한' 역사 속에서 함께 흘러가지만 '소소'했던 '다수'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역사를 굵직한 사건을 중심으로 배운다. 그 속에는 전쟁이 존재하고, 누군가의 정책적 결정이 존재하고, 외교가 존재하고, '큰' 인물과 연관된 사건이 존재한다.
'고양이 대학살'은 그런 사건과 동떨어져 있다. 그렇기에 분명 역사적 사건이라는 점에서 무게감이 떨어진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역사가 그렇게 '소수'의 사람들의 소유물이던가.
역사는 흔히 '과거에 있었던 사실'과 '조사돼 기록된 과거' 두 가지를 뜻한다. 이런 의미는 우리가 바라보는 역사란 기록으로 남겨진 거대한 사실과 사건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는 걸 보여주기도 한다.
역사(歷史)의 역은 '지나간', 또는 '세월을 보낸'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또 '겪다'란 의미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를 바라봄에 있어 '지나간 과거의 일을 겪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소홀했던 거 아닐까?'라는게 로버트 단턴의 생각이다.
거시사의 반대말로 사용되는 미시사는 '인간 개인이나 소집단의 삶을 탐색'함을 나타낸다. 고양이 대학살은 바로 그 개인이지만, 역사를 형성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그리고 사실 누구보다도 역사의 흐름에 많은 영향을 받았던 그 개인들의 시대상에 대한 이야기다.
고양이를 왜 학살했어야 하는가. 고양이는 부의 상징이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의 삶은 살기 힘든데, 부르주아로 떠오르는 자본가 계층은 사람들에게 베풀기보다는 고양이에게 베풀기를 선택했다. 그런 고양이가 밤마다 울어대며 잠도 못 자게 하니,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고양이는 얼마나 눈엣가시였겠는가.
한 도시에서 있었던 해프닝으로 지나갈 수도 있었던 이 사건은 바로 이런 대다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좌지우지하던 소위 상위 계급에 대한 분노를 표시한 방법이다.
사회는 변화하고 있었다. 인구는 늘어나지만 식량은 부족했고, 도시로 사람은 모이고 있었지만 일을 통해 받은 임금은 충족은커녕 빈곤을 벗어나기도 어려웠다. 그나마도 서서히 기계가 사람을 대신하며 상황은 더욱 좋아지지 않았고, 누군가의 배는 점점 부풀러 지지만, 누군가는 서서히 곯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내 배가 부르다면 그건 남의 일이었다.
구체제(앙시앙레짐)에 대한 분노가 쌓여 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불길이 타오르지 않았다. 1730년대 파리 생세브랭의 노동자들은 도시에 불을 지르는 것보다 고양이를 학살할 정도로 타협을 봤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을 지켜보던 왕과 귀족들은 여전히 불씨가 남아 있었음을 알지 못했고, 1789년 결국 바스티유 감옥을 시작으로 파리와 프랑스가 불길에 휩싸이게 돼버렸다.
변화는 단순히 하나의 사건에만 드러나지 않았다. 구체제의 철학에 대한 반기도 나타나고 있었다. 지식의 총체를 담고 있는 백과사전도 더 이상 신학이 아닌 다른 사상을 지식의 정수로 여기기 시작했다. 신을 우선시하지 않는다는 건, 저 높은 곳의 신에서부터 왕과 귀족, 부르주아, 노동자, 농민으로 이어진 수직적 계급 구성의 당연함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미다.
이 드라마틱한 변화는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과 함께 본다면 더욱 흥미롭다. '짐이 곧 국가다'의 시절에 모든 사람은 왕이 될 수 없더라도, 왕과 무엇이라도 비슷해지고 싶다는 데 욕구를 표출했다. 대충 손으로 집어 먹던 음식을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고, 아무렇게나 코를 풀던 습관은 손수건을 사용하는 문화가 자리 잡게 됐다. 이를 바라보는 왕과 귀족은 신으로부터 선택받았기에 대중들과 다른 자신들의 신분을 더욱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포크와 나이프는 쉽게 써버리기엔 비싼 은으로 제작됐고, 여기에 더해 애피타이저와 본식사인 고기, 이어진 디저트를 먹는 포크와 나이프를 구분함으로써 아무나 쉽게 자신들의 식생활을 따라 할 수 없도록 했다.
하지만 1789년, 왕과 귀족은 더 이상 동경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들은 뒤엎어야 할 대상이 돼 버리고 말았다.
프랑스 대혁명의 대상이 된 구체제에 부르주아가 포함돼 있냐 없냐는 차치 하자. 단턴이 말하고 싶었던 건, 우리가 바라보는 거대한 역사만이 역사의 전부가 아니란 것이다. '왕과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삶에 비해 대중들은 배가 고팠고, 그 결과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했다'라는 말로 역사를 설명할 수 있다. 그렇지만 '생세브랭의 노동자들이 학살하고자 했던 건 고양이가 아닌, 자신들을 고달픈 삶으로 밀어 넣었던 체제였다'가 좀 더 생생한 역사적 이야기가 아닐까.
거대한 흐름도 가늘기만 한 줄기가 모여 흘러간다. 소소하게 흘러가는 일상도 거대한 역사를 구성한다. 위에서부터 인지, 아래에서부터 인지가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그 속에서 함께 흘러가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고양이를 잡아야만 했던 건, 그 당시의 사람들이 바로 그 역사 속에서 함께 흘러가고 있었기에 나타난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