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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등에 새겨진 그날의 추억

르완다 이야기 8

by RUKUNDO

식사 당번은 2인 1조로 한 끼씩 돌아가며 맡았다. 당번마다 취향도 다르고, 음식 솜씨도 달랐다. 아니다, 사실 음식솜씨라고 할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입맛도 제각각이라 매 끼니마다 다채롭고 흥미로운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밀가루를 사서 수제비를 해먹기로 했는데, 어설픈 현지어 실력 덕분에 밀가루 대신 옥수수가루를 잔뜩 사 와 처치 곤란했던 적도 있다. 산 게 아까워 옥수수 스프를 만들다가 설탕 대신 소금을 쏟는 바람에, 스프를 반찬처럼 며칠을 먹었다.

라면스프가 정말 마법의 양념이다. 모든 망한 음식은 라면스프로 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딱 하나만 빼고. 된장찌개는 마법의 스프로도 구제되지 못해 결국 메뉴에서 금지당했다.


멸치처럼 생긴 정어리를 넣은 야채죽을 먹은 적도 있었다. 죽으로 시작한 음식은 아니었지만. 생선의 비릿함을 싫어하는 나에겐 목구멍으로 넘기기조차 힘든 맛이었다.


참치로 추정되는 통조림과 중국인 마트에서 구입한 돼지갈비 맛 양념을 넣고 볶았더니, 그럴싸한 반찬이 되기도 했다. 역시 식재료는 그냥 소스를 넣고 볶거나 끓여버리면 가장 안전하다.


한국에 있었으면 엄마가 해준 밥을 먹거나, 배달음식을 시켜먹었을 것이다. 전화 한통에 배달되는 짜장면이 매일 그리웠다. 컵라면이나 끓여서 대충 먹고 끼니를 떼우고 싶어도 라면자체가 귀했다. 가끔 이름을 알 수없는 나라의 라면을 사서 끓여먹기도 했지만 한국의 그맛은 아니었다.


모두가 피하고 싶어하는 것은 아침 식사 당번이었다. 조금 더 자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꿀맛 같은 아침잠을 포기한 채 먹고 싶지도 않은 아침을 준비해야 한다는 건 꽤 귀찮은 일이었다. 맛없는 음식이 완성될 확률이 높았고, 그 음식을 먹는 동기들의 눈치까지 봐야 했기에 아침 당번은 누구에게나 피하고 싶은 역할이었다. 게다가 빈말로라도 맛있다는 말 한마디 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우리 모두는 필요 이상으로 솔직하고, 불필요할 정도로 직설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날의 아침 당번은 나와 룸메이트 언니였다.

누가 봐도 심술이 잔뜩 난 얼굴로 부엌에 들어섰다. 나를 보자마자 룸메이트 언니는 잔소리를 쏟아냈다. 어차피 해야 하는 거면, 긍정적인 마음으로 좀 할 수는 없냐는 것이었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날아온 날카로운 소리가 괜히 더 언짢았다. 평소에도 수시로 으르렁거리던 사이였다. 열 살도 넘는 나이 차가 무색하게, 사소한 것 하나도 양보 없는 치열한 관계였다. 메뉴를 정하는 데에도 한참 씨름을 해야했고, 별것도 아닌 음식을 하면서도 굳이 역할 분담을 하자며 또 한 번 실랑이를 해야 했다.


내가 야채를 씻고 다듬고, 언니가 나머지 부분을 맡기로 했다. 개수대에서 야채를 씻은 뒤, 물기를 털기 위해 몸을 돌렸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사탄의 인형 ‘처키’처럼 칼을 쥔 사람이 내 뒤에 서 있었다. 놀랄 틈도 없이 뒤돌던 나와, 언니가 쥐고 있던 칼날이 맞부딪쳤다. 그림자처럼 다가온 그녀의 손에 들린 커다랗고 무딘 칼이 내 손등을 내리찍어버렸다. 살갗을 불친절하게 파고든 칼날은, 손등에 깊은 자국과 함께 피를 불러냈다.며칠 전부터 모두가 우려하던 일이 결국 내게 벌어진 것이다


우리가 사는 집은 유난히 부엌이 좁았다. 동선도 엉성해서 조금만 잘못 움직여도 서로 부딪히기 일쑤였다. 그래서 칼이나 뜨거운 것을 들고 있을 땐 절대 사람 뒤로 돌아다니지 않기로 안전을 위한 최소한의 약속을 정해두었었다. 며칠 전에도 언니와 부딪힌 적이 있어, 이미 한바탕하고 지나간 일이었다. 그때도 칼 들고 사람 뒤로 다니지 말라고 분명히 이야기했었다. 그런데도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그 언니가 내 손을 칼로 내리찍어버린 것이다. 얼굴이 사색이 되어 미안하다고 말하는 언니를 앞에 두고 나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사춘기 아이처럼 발을 구르며 걸었다. 대리석 바닥에 신발이 부딪히는 소리가 온집안을 울렸다. 일부러 소리를 내며 문을 쾅 닫고, 침대에 몸을 던지듯 누웠다. 괜히 주먹으로 바닥을 쿵쿵 내리쳤다. 부아가 치밀어 올라 가라앉을 기미가 없었다. 밖에서는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지만,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면 늘 차려져 있던 밥상의 귀함을 깨달을 무렵의 그저 그런 평범한 아침의 일상이었다.


사실 손등은 별로 아프지 않았다. 아팠던 건 생각했던 현지 생활과의 괴리감이었고 손등의 상처보다 깊은것이 괴리감에서 오는 자괴감이었다. 봉사활동을 하러 왔다면서, 정작 현지 적응은커녕 옆에 있는 한국인들과 매일 티격태격하는 내 일상이 지겨웠다.


다 큰 어른들이 모여 살다 보니 매일이 혼돈이었다.장을 보러 가는 횟수로 싸우고,방에 불을 언제 끌지를 두고 언쟁을 벌이고,일어나는 시간과 잠드는 시간으로 얼굴을 붉히는 것도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졌다. 규칙을 정해도 소용이 없었다. 내가 이 짓거리를 하려고 4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왔나. 무슨 의견이라도 내면 매번 어린애 취급을 당했고, 내 말은 좀처럼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다. 빡빡한 일정 탓에 지친 것도 있었겠지만, 매일 쌓여온 일상의 거슬림이 손등의 살갗과 함께 터져버린 것이다.


겁이 났다. 언어도 통하고, 친분도 있던 사람들과도 삐걱거리는 내가 정말 파견지에 가서 잘할 수 있을까?확신이 들지 않았다. 아직 활동은 시작도 안 했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대로 되는 게 없는 이 일상이 화가 나고, 숨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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