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완다이야기 7
내가 사는 곳은 ‘키미후루라 므이앰배’. 현지어로 큰 망고나무가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이곳에서 국내 훈련을 함께 받은 동기들과 현지 파견 전 적응 훈련을 받고 있다. 그 나라에 가면 그 나라의 법을 따라야 하듯, 국가별 맞춤형 교육이 시작된 것이다. 그 기간 동안 현지어를 배우고, 선배 단원들의 생활 노하우를 전수받으며 천천히 파견지에서의 홀로서기를 준비했다. 개성이 뚜렷하다 못해 삐죽삐죽 튀어나온 9명이 한 지붕 아래에서 지낸 지도 며칠이 지났다. 현지에 적응하기는커녕, 바로 옆에 있는 한국인들에게 적응하기도 버거운 날들이었다.
국내 훈련소에서 한 달여 동안 온종일 붙어 지냈던 동기들이었다. 다들 무난한 성격이라 함께 지내는 데 큰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게다가 나이 차이도 있어 갈등이 생기진 않겠거니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국에서의 이야기였다.
르완다에 오기까지 연착된 비행기를 기다리며 케냐 공항에서 노숙을 하고 서로를 의지했던 순간조차 이제는 아득해졌다. 내가 알던 사람들은 케냐 공항에 두고 온 것만 같았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시작된 후 20대의 나나, 30대의 오빠나, 50대의 선생님이나 모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예측할 수 없는 하루에 대한 압박감, 새로운 언어를 익혀야 하는 스트레스, 불확실한 내일에 대한 불안, 낯선 환경에 빠르게 적응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겹쳐 여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 저녁에 잠자리에 드는 것조차 다툼의 원인이 되었다. 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도 각자의 기호가 달라 티격태격하기 일쑤였다. 밥 대신 빵을 먹을지, 시리얼을 먹을지, 우유인지 주스인지로도 싸움이 벌어졌다. 냄비하나 식칼하나 조용히 사는 법이 없었다. 한국에 연락을 자주 하면 시끄럽다며 눈총을 주었고, 누군가 우울해서 가라앉아 있으면 공동체 분위기를 흐린다며 서로 할퀴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곳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동기들뿐이었다. 매일 투닥거리면서도, 결국 같은 지붕 아래에서 살아야 하는 현실이었다. 이 낯선 르완다에서 우리가 아는 사람은, 오직 우리뿐이었으니까.
이 묘한 환경 속에서 훈련 마지막 날까지 원수처럼 지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살기 위해 해결방안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르완다에 도착해서 우리가 겪은 분쟁과 짧은 생활의 경험을 토대로 몇 가지 생활규칙을 정하기로 했다. 잃어버린 평화와 안정을 찾기 위해. 외부활동이 없는 주말아침 식탁에 모여 긴 회의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정한 것은 소등 시간에 관한 것이었다.
2인 1실로 생활하는 사람이 많다 보니 자주 다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일찍 자거나 늦게 일어나는 사람이 있으니 각자의 생활 패턴을 존중하기로 했다. 소등은 일찍 잠자리에 드는 사람 기준으로, 점등은 늦게 일어나는 사람 기준으로 정했다. 소등시간을 정확하게 지키기 위해 아침 식사 후에 샤워를 하고 저녁 식사 전에 샤워하기로 했다. 그리고 개인 시간을 더 보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1층과 2층의 거실은 불을 켜 두기로 했다. 거실을 적절히 분리해, 개인별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했다.
두 번째로 정한 것은 생활비와 공동 물품을 관리하는 방식이었다.
여태까지는 돈을 중구난방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생필품을 사는 것도 망설여졌고, 필요한 물건인데도 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각자 같은 금액을 모아 공동 생활비를 마련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다시 모으기로 했다. 공용 물품은 공동생활비로 구매하되, 나중에 필요해서 가져갈 사람이 비용을 조금 더 부담하고 대신 그의 취향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하기로 했다. 또한 한국에서 가져온 라면, 인스턴트 국, 카레 같은 식재료를 각자 조금씩 내어 공용 식품으로 모았고, 특별한 날에 함께 나눠 먹기로 했다. 사실 이것이 가장 큰 일이었다. 지금껏 한국에서 가져온 라면을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같이 먹자니 양이 넉넉하지 않았고, 나눠주지 않자니 너무 쫌스러워 보였다. 물론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 음식은 현지 식사에 적응하지 못할 상황을 대비하고 다가올 향수병에 대처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 같은 존재였다. 특히나 한인마트가 없는 르완다에서는 지금 가져온 것이 더 소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 귀한 식재료를 이 짧은 기간 동안 동기들과 모두 소진해 버리는 건 아쉬운 일이었다. 모두가 쫌스럽지 않도록, 빠른 현지 적응이라는 그럴듯한 명분 아래 결국 합의가 이루어졌다.
세 번째로 정한 것은 당번을 나누는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장을 보러 다 함께 나가고, 식사 준비도 모두가 같이 하느라 부산스러웠다. 일이 제대로 되지 않고, 다툼도 많았다. 모두의 의견을 맞추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장을 보러 갈 때 드는 교통비도 부담스러웠다. 우리가 흥정을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었고, 9명이 움직이면 단순히 9배가 드는 셈이었다. 물가에 대한 개념도 아직 정확히 잡히지 않았고, 앞날도 불확실했기 때문에 불필요한 지출은 줄이자는 데 의견이 모였다. 그래서 장을 볼 때는 2명씩 돌아가며 다녀오기로 했고, 물을 사거나 무거운 물건이 있을 때는 택시를 그렇지 않을 때는 모토(오토바이 택시)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다음 정한 것은 식사 당번이었다. 우리는 외식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집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금 익숙해지면 나아질지도 모르지만, 맛집은커녕 식당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고, 식당에 가기 위해 택시를 잡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결국 하루 세끼를 직접 요리해 먹을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 엄마가 차려주던 밥상에 익숙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기에, 식사 준비는 늘 전쟁 같았다. 모두가 전쟁을 겪을 필요는 없었고, 사실 다 같이 한다고 음식이 더 맛있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2인 1조로 아침, 점심, 저녁을 나눠 담당하고, 메뉴에 대한 전권은 각 당번에게 주기로 했다.
이 정도의 규칙을 정하는 데도 우리는 치열하게 토론했고, 끝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동안 쌓여 있던 앙금이 조금은 풀린 듯했고, 부쩍 가까워진 느낌마저 들었다. 그때는 그 규칙만 잘 지키면, 평화가 올 줄 알았다. 하지만 몰랐다. 그것이 전쟁의 서막일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