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도착하니 온몸에 긴장이 풀린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홈스테이라는 것이 낯설어 잠도 잘 오지 않았는데, 그새 적응이 되었는지 편안하다. 땀과 흙먼지가 엉킨 몸을 가볍게 씻고 책상에 앉았다. 오늘 받은 시간표를 다시 살펴보고, 일기도 쓰고 책도 좀 읽어볼 생각이었다. 수업자료도 살펴봐야 하고, 밀렸던 프랑스어 공부도 좀 하고 영어공부도 해야되는데 집중이 되지 않아 애꿎은 연필만 돌려댔다.
얼마나 앉아있었을까. 문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똑똑똑”
쥬디였다. 그녀는 내게 차 한 잔을 청했다.
이 나라에는 티타임 문화가 남아 있어 저녁 무렵이면 꼭 차를 한 잔 마신다. 늘 맛없는 쿠키와 함께. 이 시간에 차를 마시면 밤늦게 저녁을 먹자고 할 게 뻔하다. 생각만해도 저녁 시간이 두려웠다. 오늘은 반드시 저녁을 먹지 않겠다고, 한국 사람은 저녁을 먹지 않는다는 말을 전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티타임 테이블로 향했다.
늘 그렇듯 예쁜 찻잔과 모양은 예쁜 쿠키가 식탁에 한가득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모양에 속지 않는다. 르완다식 차. 홍차에 우유를 붓고, 설탕을 잔의 절반은 넘게 들어간 달디 단 차였다. 모양은 예쁘지만 쿠키는 이상한 맛이 났다. 시장에서 파는 기름에 튀긴 도넛 같은 맛이 나기도 하고, 딸기잼같은데 초코잼맛이 나기도 했다. 단 차에 다시 기름지고 단 쿠키를 같이 먹으면 입이 달다못해 쓰다. 이미 여러번 속은 탓에 입안에 무언가 넣는게 망설여 졌다. 식탁에 앉아 먹는둥 마는둥 찻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앉아있는데, 그녀가 내게 말을 건넸다.
“오늘 어떻게 보냈어?”
이 한마디에 무장해제가 되었다. 누구에게라도 오늘 하루를 나누고 싶었던 모양이다. 방금전에 저녁을 거부하겠다는 말을 하겠다는 다짐은 금새 잊혔다. 나는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하루 일과를 들려주듯, 미주알고주알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쏟아냈다.
학교에서 업무 협의를 했고, 시간표도 받았다고. 어쩌다보니 주당 30시간이나 수업을 받아버렸다고. 컴퓨터실 구경도 했는데,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당황했다는 말도 넌지시 보탰다. 그녀는 내가 하는 말을 잠잠히 들어주었다. 은은한 미소로 눈을 마주치며 끄덕거리는 고갯짓에 괜히 기운이 났다.
쥬디는 전기 문제에 대한 궁금증도 해소해 주었다. 학교 회계 담당자였던 그녀는 금전적인 문제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방학기간에는 전기를 사용하기 어려울 것이라 했다. 나는 수업 준비를 위해 내가 기세니를 떠나기 전 하루만이라도 전기를 넣어줄 수 없겠냐고 물었다. 쥬디는 알아봐 주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든든했다.
내일부터 집을 구하러 다니기로 했다고 걱정이 많이 된다는 말도 털어놓았다. 그녀는 혹시 집을 구하지 못하면 자기 집에서 함께 지내도 된다고 했다. 빈말이라도 고마웠다. 사실 이곳에서의 생활도 나쁘지 않았다. 전기도 나오고, 물도 잘 나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밥도 차려주고 학교와의 거리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현지인과 함께 살고 있으니 어느정도의 안전도 보장되었다. 내가 집을 구한다 하더라도 이정도 집을 구할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신세를 질 수는 없었다. 나도 내 집을 어서 구해 새내기 단원 딱지를 떼고 싶었다. 언제까지고 ‘새내기, 신규, 신입’ 같은 꼬리표를 달고 있을수는 없었다.
어느 순간 집은 나에게 단순한 공간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집을 가져야만 비로소 정식으로 파견된 단원이 되는 것 같이 느껴졌다. OJT에서 반드시 풀고 돌아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한없이 조급해 졌다. 사실 집을 구한다고 해서 많은 것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한국에서 가져온 짐을 풀고, 내가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생기는 것 뿐이다. 분명 그뿐일 텐데 나에게는 현지에 파견이 되었다는 증명처럼 느껴졌다. OJT가 끝났고 이제 정식으로 혼자 업무를 시작했다는 신호탄처럼. 그 첫 단계가 나에게는 집을 구하는 일이었다. 아무도 부여한 적 없는 의미를 혼자 부여하고, 부담감까지 느끼며 나는 한없이 조급해졌다.
어쩌면 그 조급함이 나를 한없이 불행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