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4

by RUKUNDO


토익 990점으로 입사한 옆자리 동료.

외국 대학을 졸업해 한국어보다 영어가 편한 앞자리 동료.

간신히 영어시험 점수를 채워 입사한 나.

입사 전 등급을 나누기에 유용했을지 모르지만,

회사에서 쓰는 영어는 거기서 거기다.


사실 일상업무에서 영어를 쓸 일이 없다.

결국 매일 마주하는 영어는 ‘A4’정도다.

단순히 종이의 크기를 나타내는 말.

세상에 많고 많은 종이들이 있는데, 하필 왜 A4일까.

어쩌다 이녀석은 표준이가 되어버린 걸까.


‘종이없는 보고’를 지향하고,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고, 다양한 크기의 여러 종이가 즐비해도

A4용지의 위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대학 강의실에서는 펜보다 태블릿과 노트북이 더 익숙했지만,
회사에서는 여전히 종이를 인쇄해 놓고 봐야 하는 순간이 많다.
종이가 아니면 문서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우리 회사에서 ‘종이 없는 보고 문화’를 만들겠다며 캠페인을 벌였다.
그 일환으로 사무실에 있던 결재판을 모두 수거해 갔다.
과연 지금은 어떻게 쓰고 있을까?
결재판 대신 집게 달린 플라스틱 문서철이 등장했다.
그리고 전자결재 전, 문서철에 A4용지를 꽂아 사전 보고를 하고 있다.
딱딱한 양면 결재판에서 단면 결재판으로 모양만 바뀌었을 뿐이다.

A4용지는 당당히 새로운 결재판에 누워 존재를 과시하고 있다.


입사 전에는 A4 한 장에 이렇게 많은 문자가 담길 줄 몰랐다.

글자 하나하나에 수많은 사람의 땀이 배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A4용지 안에 적히는 글자에는 허투루 쓰인 것이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글자들을 끝까지 정성껏 읽어주는 사람은 드물다.

그럼에도 직장인들은 매일 쓰고, 지우고, 고치기를 반복한다.

어쩌면 그들의 행위는 작가의 집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보고서의 문장은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더 자주 바뀐다는 점일 뿐이다.


직장인의 시간이 담긴 이 얇은 종이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 한 장의 무게를 굳이 정의한다면 얼마라고 해야 할까.
그 안의 글자 하나하나에 금칠을 해주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한 번 보고 사라지며, 파쇄기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무심히 쌓여 있는 저 종이는, 정작 자신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을까.

아마 모를 것이다. 그럼에도 매일 그 위에 시간을 새겨 넣는다.

새겨진 시간의 의미를 아무도 몰라줄 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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