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OJT 19

by RUKUNDO

분명 내 일인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냥 쥬디와 파비앙 옆에서 가만히 서 있는 것 말고는.


교장선생님까지 달려 나오고, 그 외에 여러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내 앞에 지나가는 사람들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사람들의 소리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평소에도 집중하지 않으면 알아듣진 못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물속에 빠진 것처럼 먹먹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파비앙이 내 어깨를 가볍게 흔든다.


“이냥제, 이냥제!

괜찮아?”


괜찮진 않았지만 괜찮다고 답했다.

잠깐 컴퓨터실로 들어가자고 했다.


내가 넋 놓고 서있는 동안 상황은 정리가 되었다고 했다.

존은 학교에서 잘렸고, 존의 친구는 경찰서에 넘기겠다고 했더니 도망쳤단다.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하다며 집은 같이 다시 찾아보자고 말한다.

집이라면 진저리가 날 정도였다. 집으로 가고 싶었다.

머리가 어질 거리고, 속이 메슥거렸다.


나 때문에,

내가 여기에 왔기 때문에,

내가 어수룩했기 때문에,

멀쩡히 학교에 다니던 존이 잘렸고,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수습에 애를 썼어야 했다.

나 때문에.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

파비앙이 쥬디를 불러 함께 퇴근하라고 해주었다.

쥬디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 기억이 희미하다.

일어나 보니 다음날 아침이었다.


나뭇가지로 얼기설기 만든 커다란 대문을 밀고 터덜터덜 걸었다.

학교까지는 걸어서 5분 거리였지만, 괜히 빨리 가는 것이 싫었다. 근처 호숫가로 돌아 걸었다. 호수라 불렸지만, 수평선이 보일 만큼 넓고 때로 파랗게 일렁이기까지 하는 파도를 보면 괜히 서러워졌다. 호숫가엔 하얗고 반짝거리는 모래도 깔려있어 백사장과 같았다. 한가롭게 물에서 첨벙거리고 평온하게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다시 터덜터덜 걸었다. 어느새 풍경이 바뀌었다. 짙은 초록색의 거대한 나무들이 이정표처럼 나를 이끌었다.


마을을 한 바퀴 돌아봤다. 르완다는 작고, 그 안의 마을은 더 작았다. 아무리 돌아도 마땅히 마음 둘 곳이 없었다. 결국 내가 갈 곳은 교실뿐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어디인가. 무엇을 한 걸까. 길을 잃은 주제에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머릿속을 집어삼킨 질문이 나를 짓눌렀다. 이게 좌절이라는 것인지 압도당한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짙은 나무들이 만든 작은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마른땅의 먼지가 원망스러워진다.

길의 끝자락에서 초록 철문이 보인다.

도시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학교, 그 학교의 가장 모퉁이에 있는 그 초록 철문.

잘 열리지도 않는 무거운 문과 한바탕 씨름을 하고 나면 전등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교실에 들어갈 수 있다..

아무도 없는 교실이지만 공간이 주는 무게에 그날도 압도당했다. 따스한 햇볕과 문밖에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공간을 감싸주려 했지만 그 모든 감각조차 버거웠다.

그간의 삶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보다 나이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컴퓨터 교사로 파견된 지 한 달 남짓.

이놈의 컴퓨터는 제대로 켜지지도 않았다.

겨우 고친 컴퓨터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끊어지는 전기 탓에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정상적이라는 단어가 낯설어 질만큼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이런 환경은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환경과 문화, 그리고 사람과 사회,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로운 곳에 적응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매 순간이 전쟁이고 도전이었다.

말도 통하지 않고 의지할 친구 하나 없던 이곳서의 삶은 외로움 그 자체였다.

알 수 없는 답답함까지 더해져 무기력했다.

그동안 눌러왔던 모든 감정이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돌아 도착한 교실에서, 나는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느껴졌다. 그간 눌러왔던 설움이 와락 터져 나왔다.


교단에 걸터앉아 펑펑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한 건 파비앙이었다.


알아듣지도 못할 말이 쏟아질까 봐 바짝 긴장한 채 고개를 들었다.

별다른 말 없이 그는 나를 어딘가로 데려갔다.

도착한 곳은 마을에 하나뿐인 호텔 안의 현대식 카페였다.

르완다답지 않은 밝은 조명,

깔끔한 실내 분위기와 현대식 실내장식이 너무 낯설어 꿈꾸는 것 같았다.

하얀색 유니폼을 입은 종업원이 가져온 커다란 쟁반.

처음 보는 모양의 은색 주전자와 르완다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얼음이 가득 담긴 컵,

차가운 컵에 가득 담긴 새까만 커피를 말없이 건네는 파비앙.

종업원을 시켜 갖다 준 새까만 액체.

뭔지도 모른 채 넙죽 그 잔을 받아마셨다.


눈물 콧물을 훌쩍거리며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내 목으로 들어온,

차갑고 씁쓸하고 고소한 그 한 모금은 내 인생 최초의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그날 정확히 무슨 말을 나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뒤돌아보면 그렇게 특별히 힘든 날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뭐가 그렇게 서러웠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쌉쌀하고 고소하고 차갑고 따뜻했던 맛은 또렷이 기억에 남는다.

그 한 잔 덕분에 나는 르완다에서의 남은 시간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 커피가 르완다 커피를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프렌치 프레스 커피'라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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