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크기와 행복의 상관관계
나는 고향을 떠난 후 줄곧 유목민이었다. 내 집이 없어 거의 매년 이사를 다녔다. 서울 유목민 생활의 시작은 원룸에서 시작했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오르막길을 한참 오르면 집에 도착했다. 여름이면 땀에 흠뻑 젖었다. 누군가 말했다. 인생에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다고. 애써서 오르막길을 올라 건물에 도착하면 출입문을 통과해 한 층 내려가야 했다. 지대가 높은 곳이라고 조망이 다 좋은 건 아니었다. 그 방의 창밖 풍경은 쇠창살이었다.
반지하 원룸에서 2년을 살았다. 그곳에는 매트리스, 옷장, 책상, 소형 냉장고, 소형 세탁기, 화장실이 있었다. 생각보다 장점이 많은 집이었다. 반지하 치고 곰팡이가 잘 생기지 않았고 난방이든 냉방이든 10분만 가동하면 곧바로 효과가 나타났다. 청소도 5분이면 끝이었다. 단점은 방음과 담배 연기였다. 옆 방 대화 소리가 들렸고 간혹 외부에서 흡연하는 이들이 내뿜는 담배 연기가 반지하 창문을 타고서 들어왔다. 빨래를 널으려면 5층 옥상까지 계단을 오르내리는 ‘등단’을 해야 한다는 것도 단점이었다.
사정상 신혼집으로 이사를 가기 전 아내와 3개월 동안 반지하 원룸에서 함께 살았다. 부부가 되기 위한 시험 무대는 15㎡(4.5평)였다. 우리는 그 좁은 공간에서 함께 자고 먹고 쌌다. 문 하나를 경계로 주방과 화장실이 있었다. 의도치 않게 오감을 통해 서로를 면밀히 느낄 수 있었다. 그 집은 생존하기 위해 부족하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인간다운 삶을 위해 우리는 주말이면 기어코 외출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싸움 없이 생활했고 진심으로 행복했다.
우리는 국가가 인정한 ‘부부’가 되었다는 이유로 신혼부부 전세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반지하 원룸생활을 마치고 산자락 옆에 위치한 자연친화적인 투룸으로 이사했다. 면적은 48㎡(14.5평). 이전과 비교하면 세 배에 달하는 넓이다. 우리는 '마당을 나온 암탉 가족' 같았다. 무엇보다 먹는 공간과 싸는 공간과 자는 공간의 구분이 명확해졌고 화장실 들어갈 때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긴장감은 사라졌다.
그러나 오르막길로 귀가하는 생활은 지속됐다. 빌라가 산 중턱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매일 건물까지 오르막길을 올라야 했고 건물에 도착해서도 엘리베이터 없이 5층까지 또 계단을 올라야 했다. 다행히도 고생한 보람은 있었다. 낡은 집이었지만 방마다 크게 창문이 나있었고 안방 창을 통해서는 남산과 종로를, 거실 창으로는 낙산 풍경을 즐길 수 있었다. 안방 옆쪽으로는 낙산 산자락이 자리 잡고 있었고 덕분에 테라스로 새들이 자주 찾아왔다. 주말이면 짹짹거리며 늦잠을 자는 우리를 깨웠다. 낮에는 창문을 열고서 커피를 마시며 계절감을 느끼며 여유를 만끽했다. 작게나마 테라스에 텃밭을 가꾸어 방울토마토와 상추를 수확하기도 했다. 자연스레 반지하에 머물던 때에 비해 집에 머무는 시간도 늘어났고 공간이 넓어진 만큼 우리에게 집의 의미도 확장되었다. 우리가 느끼는 행복의 스펙트럼도 다양해졌다.
그곳에서 2년을 살았다. 우리는 이사 가는 날까지도 집에 대한 애정 때문에 아쉬워했지만 매일 오르막길을 오르는 생활을 청산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새로 알아보는 집의 조건 1순위를 엘리베이터로 삼았다. 아파트를 구하기엔 재정적으로 버거웠고 결국 엘리베이터가 있는 고층 오피스텔 전셋집을 구했다. 면적은 50㎡(15평).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다. 고층이어서 조망은 좋다. 테라스 텃밭은 없지만 거실 창문 너머 숲을 통해 계절감을 느낀다. 아침잠을 깨워주는 새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고층 아파트 숲과 근린공원 숲을 오가는 새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1층에는 24시간 편의점이 있고 10분 거리에 대형 마트, 집 맞은편에는 생협이 있어 편리함을 누린다. 하지만 층간소음에 시달리면서 수직 동서남북으로 의도치 않게 이웃들과 다소 불편한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건너편에는 대형병원이 보인다. 병원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안정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묘하게도 그 옆의 장례식장 때문에 우울감을 동시에 느끼기도 했다.
서울 유목민으로 살아온 5년간 세 곳의 집을 거쳐왔다. 집들은 각기 다른 얼굴과 성격을 가진 친구처럼 나를 변하게 만들었다. 공간의 위치와 구조에 따라 우리의 만족도는 완전히 달랐다. 공간이 사람과 삶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몸소 깨달았다.
우리 부부는 거쳐온 집들의 크기와 관계없이 늘 꽉 찬 사랑을 했다. 아주 좁은 반지하 원룸에서의 3개월도 내내 행복했으니 공간의 크기는 사랑의 깊이와 꼭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도 몸소 배웠다. 그러나 그 시절 우리의 사랑을 가능하게 한 것은 '곧 더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3개월이라는 한정된 불편과 예고된 희망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다.
사회학자 숑바르 드 로브는 부엌과 욕실, 현관, 복도를 제외한 공간의 면적을 '순수 거주면적'으로 정의했다. 숑바르 드 로브에 의하면 1인 기준 8㎡ 이하의 거주면적은 거주자의 신체적 및 정신적인 건강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 그는 16㎡ 이상을 1인에게 적당한 거주 면적으로 적극 추천했다. 내가 살았던 반지하 원룸은 현관과 화장실을 포함한 모든 공간의 면적이 15㎡였다. 결코 넓은 공간은 아니었다. 이론상 둘은 물론이고 한 사람이 살기에도 신체적 및 정신적인 건강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는 면적이었다. 다행히도 반지하에 사는 3개월 동안 우리의 건강에는 이상이 없었고 우리 부부의 사랑에도 다행히 금이 가지 않았다.
사랑과 행복에도 적정 공간은 필요하다. 현재 국토교통부 기준 4인 가구 최소 주거기준은 43㎡이다. 기준만 놓고 보자면 최근 논란이 된 44㎡(13평)은 4인 가구에 적합한 넓이다. 실제 44㎡(13평)에 살고 있는 4인 가구 당사자들도 충분한 넓이라고 동의할까? 국토교통부의 주거공간 최소기준은 어떤 근거로 마련된 걸까.
우리 부부가 더 나은 집에 대한 기대로 3개월의 불편을 감내한 것처럼 사람들 역시 각자가 기대하는 '더 나은 삶'을 고대하며 하루하루를 감내할 것이다. '13평 4인 가구 발언'에 대한 분노는 어쩌면 그 희망에 대한 동상이몽을 확인했기 때문이 아닐까.
거실 창밖 장례식장을 바라보다 그 너머의 숲으로 시선을 옮겼다. 비록 지금은 희망보다 우울이 더 가까이 있지만 그 너머 숲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한다. 도시 유목민인 우리는 공간을 사랑하는 법을 매일 배우고 있다.
ps.
코로나라는 변수가 등장한 이후 안전은 사회 계급을 나누는 또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안전의 기준 중 하나는 공간이다. 누군가는 공간의 넓이에 분노하겠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좁은 공간마저 절실하다. 공간의 급을 나누는 무분별한 비난이 최소한의 정책마저 절실한 이들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한다.
(오마이뉴스 '내가 살던 그 집' 기획 기사로 발행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