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가슴 한편에 어떤 형태로든 세계여행을 꿈꾸지 않나? 적어도 내 주변에는 여행을 가기 싫어하는 사람보단 세계여행을 꿈꿔본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나는 홀로 떠나는 세계여행을 꿈꿨었다.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경험을 원했기 때문이다. 지긋지긋한 경쟁사회에서 벗어나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홀로' 떠나고 싶었던 이유는 고독, 그 자체를 갈망했고 나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인생을 제대로 살아보려면 한 번쯤은 오롯이 고독을 경험해봐야 한다. 외딴곳에 홀로 있기가 지루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야만 더 이상 자기 자신 이외의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 그러면서 자신의 숨겨진 진정한 힘을 알아보는 법을 배운다. 가령 배고플 때 먹고 잠이 올 때 자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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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인 이유로, 아니 여러 핑계로 세계여행을 떠나지 않았다. 지구 반대편이 아니더라도 종종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 홀로 떠난 여행 도중 만난 인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혼자였다. 낯선 곳에서 혼자 여행을 하다 보면 각종 난관에 부딪혔다. 해파랑길 종주 때는 걷다 보니 숙박업소가 없는 오지에서 노을을 맞이했다. 주민에게 물어물어 마을버스 막차를 간신히 탔고 찜질방이 있는 읍내로 갈 수 있었다. 제주도 스쿠터 종주 때는 태풍이 불었다. 머리카락이 벗겨질까 무서울 정도로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외출은 엄두도 내지 못할 날씨였다. 게스트 하우스 근처에는 식당이 없었다. 하지만 게스트 주인 분께서 시내에서 매운탕을 사다 주셔서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었다. 매번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주변 사람의 도움이 있었다. 여행이 끝나면 여행지의 풍경과 공기도 기억에 남았지만 여행 중 만났던 사람들과의 추억이 진하게 남았다.
어딜 가든 사람이 있었다. 안면이 없을지라도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무모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세계여행을 떠나면 오지에 닿을 수 있고 문명의 영향이 덜 한 곳에서 참된 '나'를 마주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환상이 있었나 보다. 불이 필요하면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불을 피우고 식량이 없으면 사냥하거나 나무 위에 올라가 과일을 채집하는 환상 말이다. 생존을 위해 과연 나는 '타잔'이 될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타잔이 되기 위해 등산을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주로 평일이나 비수기에 등산을 다녔다. 주말이나 성수기에 대한민국 산보다 시끄러운 곳은 없기 때문이다. 산은 간편하게 고독을 만끽할 수 있었다. 때로는 나 자신을 시험해보고 시험에 통과하면 성취감까지 느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지리산 2박 3일 종주, 나 홀로 후지산 오르기와 같은 여행들을 떠났다.
땀 흘리며 산을 오르면 모두가 평등해진다. 높은 곳에서 사람들은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대피소에서는 다들 너그러워진다. 자연스럽게 그곳의 통솔자 역할을 맡는 사람도 폭군이 아니고 사려 깊고 배려심 많은 주인이다. 아무도 사회에서 도피하지 않았다. 모두들 접시를 앞에 두고 모여 앉아서 사회와 비슷한 작은 무언가를 다시 만들어내기까지 한다. 저 높은 곳에서 관찰 지점은 하나뿐이다. 마을로 다시 내려오면서 산꼭대기로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을 잊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높은 곳에서 형성된 민주주의적 공간은 기쁜 마음으로 되돌아 나오는 건설적인 망명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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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비수기더라도 산에도 늘 사람은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고독하게 여행을 마칠 수 있었지만 매번 사람들과 함께 했다. 고독감을 맛보기 위해 떠난 여행이지만 나는 금세 소통을 원했다. 산에서 만난 여행객들과의 소통은 산 아래 도시에서 함께한 사람들과는 달랐다. 라면 한 봉지, 사탕 한 주먹, 삼겹살 한 점을 자연스레 건네고 감사히 받았다. 절대 주고받지 않았던 게 있다. 바로 전화번호다. 서로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산 아래 도시의 이야기도 되도록 하지 않았다. 산을 오르며 겪었던 에피소드와 노을 질 무렵의 정상의 풍경을 이야기했다.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아무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눴다. 산 위의 대피소는 동떨어진 또 다른 사회 같았다.
어쩌면 나는 홀로 있고 싶어 하지만 지독히도 함께 하고 싶어 하는 존재인 것 같다. 두 개의 욕망이 공존하는 게 스스로도 모순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자발적 고독>을 통해 왜 두 가지 마음이 공존하는지 어느 정도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책에는 '자발적 고독'을 선택하고 실제로 실천한 선배들이 나온다. 특히 소로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소로를 오두막으로 떠나 삶의 진리를 추구했던 지식인으로만 기억했었는데 <자발적 고독>을 통해서는 고독과 사회적 연대를 연결지은 철학가이자 사회운동가 면모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
소로는 오두막에 다른 기능이 있다고 여겼다. 그에게 오두막은 몸을 숨기기 위한 곳이 아니라, 잠시 뒤로 물어나 있는 곳이었다. 뒤로 물러나 있을 때에도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볼 수 있다. 그는 사회를 관찰하기 위해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적당한 거리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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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의도적으로 일상을 멀리서 보는 연습을 한다. 특정 주제에 천착하여 골똘히 고민하다 보면 정답이 나오기도 하지만 오히려 수렁에 빠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때로 창의적인 해답을 주거나 새로운 길을 열어주기도 한다. 나는 주 5일 출근하는 직장인의 삶을 살았을 때에도 고민하던 문제 대부분을 휴가나 여행을 통해 어느 정도 해결했다. 코로나로 여행을 떠나기 어려운 시국이다. 여행과 휴가가 아니어도 내 일상을 멀리서 관찰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다. 산책과 샤워다. 매일 할 수 있는 데다가 마음먹으면 바로 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기분 전환에 효과가 있고 앞서 말했듯 내 일상을 조금 떨어져서 관망할 수 있다.
최근 동물권 활동을 시작했다. 코로나로 인해 지금은 비록 온라인 활동에 그치는 경향이 있지만 사람을 만나고 책을 읽더라도 동물권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어느 순간 객관적이지 못하고 감정적인 상태의 나를 보기도 한다. 그러던 찰나에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소로처럼 나의 일상과 사회를 멀리서 보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곳에서는 서로 대화를 나누지 않지만 단 한순간도 외롭다고 느끼지 않았다. 나는 비로소 나 자신과 하나가 되었다.
매티슨의 말 /p. 53
고독과 연대는 물과 기름의 관계가 아니었다. 소로는 연대하기 위해 고독을 선택했고 매티슨은 고독을 통해 자신과 연결됨을 느꼈다. 고독과 사회적 연대는 이어져 있다. 책 제목은 <자발적 고독>이지만 정작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연대'와 '연결'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