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우 Apr 01. 2021

채식과 동물권은 '취향'이 아닙니다

<동물주의 선언>을 읽고

"모든 동물은 생태계에서 존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 권리의 평등은 개체와 종의 차이를 가리지 않는다."

- 1978년 유네스코 세계동물권리선언 제1조


거리를 걸어도, 티브이 채널을 돌려도, 우리는 동물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동물은 친숙한 존재가 되었다. 동물과 함께 사는 인구가 1,500만에 육박했다. 동물이 인간과 더욱 친해지는 동안, 그리고 유네스코 세계동물권리선언으로부터 43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동물권은 향상되었는가?


동물권은 동물의 권리를 뜻한다. 하지만 동물과 권리라는 단어가 한 문장 안에 서있는 모습은 아직은 어색하다. 동물권을 논하기엔 이른 시기인 걸까? 우리 사회는 하루가 멀다 하고 길고양이를 무참히 살해하는 학대 사건 그리고 함께 사는 강아지를 때리거나 버리는 일이 뉴스 기사로 나오고 있다. 어쩌면 동물복지, 동물보호, 동물애호가 훨씬 더 현실적일지도 모르겠다.


현실 세계에서 동물권 이야기는 발전적으로 논의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동물권과 관련한 문제는 보통 선악, 정의, 논리의 문제로 다뤄지지 않는다. 동물권과 관련한 내용 중 특히 채식이란 화두에 대해서는 '개인의 취향' 혹은 '호불호(好不好)' 문제로 선을 긋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채식 관련 기사의 댓글들이다. 채식과 관련한 기사를 살펴보다 보면 두가지 단골손님이 등장한다.


첫째, '채식을 강요하지 마라!'

채식 혹은 육식의 논의는 개인 '취향' 정도로만 다뤄진다. 개인의 선호의 문제이기에 음식의 취향을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과연 개인의 '취향'으로 다룰 문제일까? 채식의 문제에 도덕과 정의 가치를 내세우면 채식인들은 도덕적 우월감에 취한 사람으로 매도된다. 동물의 고통과 학살의 문제를 단순히 취향으로 다룬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이 사회가 동물을 오랫동안 어떻게 다뤄왔는지 알 수 있도록 보여주는 현실이기도 하다.


둘째, '동물권이 있다면 식물권도 있다. 우리의 친구, 시금치와 쌀을 죽이지 마라!'

식물권을 주장하는 이들의 마음을 '진실 혹은 거짓' 가리는 건 뒷전으로 두더라도 동물주의자들이 생명권이 아니라 '동물권'을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식물 역시 편견의 피해자가 될 수 있지만, ‘감수성’을 가진 존재만이 편견의 피해를 개별적이고 주체적으로 겪는다. 감수성은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 자아실현의 욕망, 죽음에 대한 공포, 강제된 삶의 조건에 대한 저항, 즐거움, 협력의 의지,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 모두를 말한다. ... 모든 사람과 모든 동물은 도덕의 단순 수혜자나 도덕과 권리의 대상에 머무르지 않고 행위성을 갖춘 정치적, 도덕적 주체이다.     
<동물주의 선언> / p. 65

물론 종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고 인간동물과 비인간동물 간의 차이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비인간동물도 인간이 지닌 '감수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동물권 단체가 동물복지를 주장하는 게 적절할까?

동물권 단체와 활동가들의 헌신으로 동물의 현실은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불편한 진실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이들조차도 착취당하고 학대당하고 학살당하는 동물의 현실을 미루어 짐작하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활발히 논의되는 것은 동물권이 아니라 '동물복지'다.


동물복지의 개념은 동물권 범주 안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지만 동물권과는 구분되는 개념이다. 동물복지라는 단어는 아마도 노인복지, 아동복지, 장애인복지와 같은 단어에서 차용해온 것으로 보인다.


동물복지는 다른 복지와는 크게 다른 점이 있다. 동물복지는 야생동물에게 사용되는 개념이 아니다. 먹히기 위해 길러지는 농장동물, 인간의 이익을 위해 실험당하는 실험동물 그리고 전시동물 등에 해당한다. 즉 인간이 정해놓은 선을 넘을 수 없는 동물에 해당하는 말이다. 곱씹어보면 '복지'라는 말이 얼마나 시혜적인 단어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농림축산식품부의 동물복지 제도를 꼼꼼히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그렇다면 동물복지 제도는 효용성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 현시점에서 동물복지 제도는 어떤 식으로든 동물들의 고통 총량을 줄이는 데 기여할 것이다. 케이지에 살던 닭이 조금 넓은 축사에서 땅을 딛고 살게 되면 여러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다. 발톱이 케이지에 걸릴 일도 없고 동료 닭을 쪼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피부병의 문제도 줄어들 것이다. 분명히 효용성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대안'이 되어야 한다. 동물권 단체 혹은 동물주의자가 앞서서 '동물복지'를 주장하는 사태가 벌어져서는 안 된다.




동물권, 정치의 장으로!

동물복지를 넘어 동물권이 사회에서 논의되려면 정치의 장으로 들어서야 한다. 동물권이 정치의 장으로 들어서는 데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다. 바로 당사자성 문제다. 흑인, 여성, 장애인 등 다양한 인권 문제가 나아질 수 있었던 이유는 당사자가 목소리를 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인간동물은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정치의 장으로 들어선다는 건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법이나 제도를 변화하는 영역에 들어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전히 인종차별과 성차별은 존재하지만 흑인과 여성은 '시민'으로서 인정받고 투표권을 행사한다. 법과 제도를 바꿀 힘이 있다. 하지만 비인간동물은 그렇지 않다. 투표권이 없다. 당연히 비인간동물은 투표권을 갖고자 하는 욕구가 없다. 동물주의자의 동물권은 '당사자성의 부재'로 결부된다. 치명적인 약점이다. 반면 인간동물도 동물이기에 동물권을 주장하는 게 당사자성 문제에 모순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나는 동물권이 정치의 장으로 오기 위해서는 인간동물이 비인간동물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물당을 창당해야 한다. 동물의 목소리를 한 데 모을 수 있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소설이 아니다. 실제 유럽을 비롯한 미국과 브라질을 포함한 19개국에는 동물당이 있다.



동물주의자에게 남겨진 숙제

따라서 어떤 산업을 금지하는 제안을 할 때에는 동시에 이들이 새로운 산업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과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 동물에게 정의로운 사회는 인간에게도 정의로운 사회이기 때문에 관련 산업 종사자가 직업을 바꾸는 과정이 그들에게 고통을 주거나 그들로 하여금 일종의 응징이라고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사람들의 삶이 보다 만족스러워지고, 그들 스스로의 가치를 긍정할 수 있는 경험이 되어야 한다.
<동물주의 선언> / p. 93

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동물주의자는 실험, 전시, 식용 등 인간의 이익 목적으로 동물을 사육하고 죽이는 행위에 반대한다. 앞서 언급했듯 사회와 가장 밀접한 문제로는 '육식'의 문제가 있다. 동물주의자는 축산업 철폐를 주장한다. 고기 소비가 많다는 건 그만큼 죽는 동물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축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다. 사육, 운송, 도축, 유통, 판매 등 모든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윤으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다. 따라서 축산업 철폐를 논의하려면 반드시 축산업에 종사하는 인간동물의 삶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그렇기에 이 문제가 단순히 '옳고 그름'의 문제로 끝날 수 없다. 나를 포함한 동물주의자는 이 문제에 대해 깊고 치밀하게 고민하고 대안을 찾아야 한다.



저자 코린 펠리숑은 동물주의자에게 다음과 같은 부탁을 하며 책을 마무리한다.

외면하지 않는 용기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런 용기를 지니지 못한 듯이 보이는, 그러나 사실은 자신도 여전히 포함되어 있는 ‘그 사람들’에게 폭력적으로 화풀이하지 않도록 당부한다. 화풀이가 아니라, 자신이 알게 된 고통을, 절대로 아물지 않을 상처를 보듬고, 그 마음으로 다른 이들을 그러한 ‘지옥’ 같은 고통 혹은 일상의 불편함으로 초대하는 일이라는 것을 숙지하고 부드럽고 천천히 그러나 끈기 있고 힘 있게 어려운 초대를 하라고 말한다. 얼마나 불편한 일인가.
<동물주의 선언> / p. 134

<동물주의 선언> 두꺼운 책은 아니다. 144페이지의 지만 알찬 책이다. 동물권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거나 이미 동물주의자로 살아가는 이에게 해답을 주기도 하겠지만  다른 고민을 낳게 할지도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수산시장은 비명 없는 무덤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