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의 <김지은입니다> 다시보기
나는 그날 죽임을 당했다.
_이토 시오리
1. 김지은 씨의 삶.
<김지은입니다>는 권력자 안희정의 추악하고 잔인한 성폭행을 고발한다. 또한 대한민국 평범한 여성이 기록한 고통의 자서전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여성 청년의 삶, 이혼 여성의 삶, 계약직의 삶 그리고 학위를 필요로 하는 노동자의 삶. 고단한 삶이었다. 충분히 숨 막히는 삶이었다. 그러던 중 김지은 씨의 삶을 무자비하게 관통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2. 수행비서라는 특수직에 대하여
생계의 안정을 위해 학위를 시작했고 우연찮게 들어온 제의에 ‘세상을 바꿔보고자’ 안희정 캠프에 들어간다. 안희정 사생팬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캠프에 참여하면서 수행비서로 일하기 시작한다. 책에는 비서라는 직업의 특수성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비서 김지은은 안희정의 요술램프였다. 24시간 대기해야 했고 원하는 모든 것을 제공해야 했다. 단순히 옆에서 보필하는 ‘매니저’ 수준의 직업이 아니었다.
p.100
미투 이후 나는 “왜 네 번이나 지사의 방에 갔느냐”는 말을 수없이 들어야 했지만, 그날들은 사적 심부름 때문에 불려 갔던 수백 번 중 아주 일부에 불과했다.
3. 권력형 성폭행범 안희정
p.116
조배죽, 안희정 조직의 회식 자리에서 고위 참모가 종종 하던 건배사다. 조직을 배신하면 죽는다.
안희정 캠프는 단순히 도지사직을 위한 캠프가 아니었다. ‘대통령 만들기’에 미쳐있고 치밀하게 계획하는 조직이었다. 목표 달성을 위해 조직원들의 희생이 필요했다. 조직에서는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었고 또 묻힐 수 있었다. 주먹만 쓰지 않았을 뿐이지, 조폭이나 다름없었다. 우두머리는 안희정이다. 안희정은 도지사직을 수행하면서도 불법을 일삼았다. 도청 예산으로 개인 포털을 만들었고 안희정 지지자들을 위한 숙소비도 제공했다. 지인들에게 개인적으로 선물을 돌리기도 했다.
안희정은 ‘대통령감’으로 거론될 정도로 인기몰이를 했다. 젊음과 진보를 상징하는 신세대 정치인이었다. 마이크 앞에서 민주주의와 젠더 감수성을 외쳤다. 그럴 때마다 박수와 갈채 소리가 터져 나왔다. 늘 팬들의 함성과 북적이는 인파가 그를 둘러쌌다. 곧 대통령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뒤돌아서면 독재자가 되었다. 자기를 쫓아오는 팬들을 제대로 막지 못한 비서들을 나무랐고 성추행과 성폭력을 서슴지 않았던 독재자였다. 정치인 안희정은 민주주의를 외쳤지만 조직 우두머리 안희정은 계급적이고 독단적이었다. 정치인 안희정은 젠더 감수성을 외쳤지만 조직 우두머리 안희정은 권력형 성폭행을 버젓이 저지르고 있었다. 김지은 씨는 조직 내에서 도움을 요청했다. 그때 돌아온 대답은 ‘네가 참아라’였다. 성폭행도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누가 촘촘한 그 조직망을 뚫고 나올 수 있었을까. 김지은 씨는 용기를 내었고 결국 미투했다. 조직 내에 증인 요청을 거절한 이도 있었지만 다행히 수락한 이도 있었다. 그렇게 김지은 씨는 안희정을 성폭행범으로 고소했다.
150p
세 명의 판사는 피고인 안희정에게는 묻지 않았다.
‘왜 김지은에게 미안하다 말하며 여러 차례 농락했는가?’
‘왜 직접 페이스북에 합의에 의한 관계가 아니었다고 썼는가?’
‘왜 세 번이나 입장을 번복하였는가, 일관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왜 검찰 출두 직후 휴대폰을 파기했는가?’
왜 법원은 가해자 안희정에게는 묻지 않았을까?
권력은 타자의 행위를 제한하기도 하고 타자를 강제하기도 한다. 자기의 생각을 타인에게 실현시킨다. 위력에 의한 성폭력은 약자를 대상으로 한다. 하지만 1심에서 ‘위력이 존재하지만 위력은 아니다’라고 판결한다. 과거 판례에서는 미성년자나 지체장애인들이 피해자인 경우 ‘위력에 의한 성폭력’이라 칭했다. 법원은 1심 판결에서 김지은 씨가 위력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150p
‘위력은 존재하나 위력이 아니다. 거절은 했지만 유죄다.’
‘합의하지 않은 관계이나 강간은 아니다.’
‘원치 않은 성관계는 있었으나 성폭력은 아니다.’
4.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사회
172p~173p
애초에 ‘피해자의 과거의 이력’을 묻는 것은 해외에서는 금지되어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최근 대법원 젠더법 연구회가 조사한 결과에서는 피해자의 평소 품행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고 꼽았다. 하물며 그 언급이 사실조차 아니었음에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241p
제가 일상을 살아도 될까요?
“친한 친구 결혼식에 가도 될까요?”
“아끼는 동생의 할머니 장례식장에 가도 될까요?”
“카페에 가도 되나요?”
“친구를 만나도 되나요?”
“미용실에 가도 될까요?”
“식당에 가도 되나요?”
296p
‘피해자다움’. 피해자가, 피해자답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김지은 씨는 생존을 위해 대학원에 갔다. 그런데 이게 발목을 잡았다. 사람들은 고학력자라는 이유로 네 번이나 성폭행을 당하면서도 신고하지 않고 퇴사하지 않았다는 점에 의문을 제기했다. 김지은 씨는 이혼한 여성이었다. 욕망 있는 여성이라며 사람들은 성적 대상화하였다. 또한 안희정이 결혼해주지 않아 미투했다는 근거로 사용되었다. 우리 사회는 김지은 씨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했다. 미투 이후에 직장을 잃었다. “성폭력 피해자인데도 잘 사네? 성폭력 당한 거 맞아?”와 같은 환청이 귀에 맴돌았을 것이다. 새로운 직장을 얻거나 이전 직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피해자다움'은 내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내용이었다. 일종의 찔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폭력 피해자를 바라보는 나의 태도에 반성했다. 충격적이었다. 나도 언젠가 그랬었던 것 같다. 피해자다움을 요구했었다. 피해자가 저렇게 잘 살아도 돼? 피해자가 저렇게 웃을 수 있어? 피해자가 카페에서 커피 마시며 수다 떠는 게 가능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 그리고 우리 사회는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한다. 거꾸로 생각해보자, 피해자의 입장에서. 끔찍한 일이다.
5. 평범한 삼십 대 남성이 바라본 대한민국의 권력형 성폭행
170p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내 설명을 믿어주고 내 편에 서주며 나에 대한 어떠한 판단도 하지 않는다. 그저 믿어주고, 지지해주고, 신뢰해주는 것, 그것이 성폭력 피해자에게는 가장 큰 힘이 됨을 직접 경험했다. 패해를 입은 사람에게는 잘못이 없고,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고 말해주는 것, 그 말 한마디에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성폭력 피해자는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온다.
수감 중인 안희정, 자살한 박원순. 카메라 앞에서는 젠더 감수성을 외치면서 어두운 곳에서는 권력을 이용해 성폭행과 성추행을 저질렀다. 악마화하지말라고? 제발 그들을 '이상화'하지 말라.
혹시 자꾸 의문이 생기고 무언가 다른 속셈이 있을 거라고 의심되는가? 정치적인 음모가 있을 거라고? 증거가 나오기 전엔 믿을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할 수는 있다. 생각만으로는 무엇이든 가능하다. 마음껏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입을 다물자. 당신이 증인이 아니라면, 게다가 그 의문이 단순한 의심과 궁금증이라면 더욱더 입을 다물자. 용기 내어 신고한 피해자에게 '증거를 내놓으라'는 압박은 하지 말자.
나라고 과연 이런 문제로부터 자유로운가? 떳떳할 수 있을까? ‘모른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가 답일 것이다. 나에게도 권력이 생긴다면 그러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성폭행범 안희정은 결국 처벌받았다. 1심은 무죄. 2심은 3년 6개월 형. 대법원은 2심 판결 확정. 4번의 성폭행의 결말은 3년 6개월 형이다. 고작 3년 6개월. 무죄 판결을 피한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피해자 김지은 씨는 판결 이후에도 2차 가해의 고통과 공포에 시달린다고 밝혔다. 피해자가 직접 되어보지 않는다면 피해자의 심정을 다 이해할 수 없다. 그 고통을 짐작할 수 없기에 피해자의 편에 서서 바라보기로 했다. 믿어주고 지지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기도한다. 김지은 씨가 평범한 일상을 누리길, 그의 증인들이 평범한 일상을 누리길, 그리고 이 시대 '모든 김지은 씨와 증인들'이 평범한 일상을 누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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