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민의 <쓸 만한 인간> 다시 보기
연예인 책 그리고 나의 시샘
나는 연예인이 내는 책에 별 관심이 없었다. 목차조차 읽어본 책이 없다. 출판사가 책 한 권 더 팔아보려는 장사치 마인드와 연예인이 책 한 권 내보려는 허영심이 만든 결과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박정민 책도 그런 책일 거라고 정의 내렸'었'다. 책 표지도 보지 않고서. 참으로 오만한 생각이다. 실은 장사치 마인드와 허영심은 내게도 있는데도 말이다. 왜 책에만 더 숭고한 가치를 부여하려고 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재테크 책은 경제전문가가 잘 쓰는 법이고 운동 책은 운동전문가가 잘 쓰는 법이지만 에세이는 누구나 쓸 수 있지 않은가. 나도 쓴다. 책은 결국 사람이 쓰는 것이기에 동일한 내용이어도 누가 말하는지가 중요하고, 그게 대중에게 인정받는 연예인이라면 그 사람 이야기를 들어볼 만하지 않은가. '쓸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고 읽을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다. 왜 그동안 연예인의 책을 홀대해왔는지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뭐 다른 이유들도 있겠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나의 시샘이었다. 그렇게 결론 내렸다.
내가 배우 박정민의 책을 꺼내 든 이유
배우 박정민은 영화 <파수꾼>을 통해 알게 되었다. 영화를 잘 보지 않던 나는 <파수꾼>을 통해 영화의 재미를 알게 되었다. 특히 백희의 감정에 이입되었고 '백희' 역을 연기한 박정민 배우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그러던 차에 아내가 박정민 배우 책을 추천해줬었다. 글도 잘 쓰고, 사람이 진중하고 괜찮은 사람 같다고. 책장에 박정민이 쓴 책 한 권, 박정민에 대한 책 한 권. 그 사람에 관한 책이 두 권이나 있다. 그래서 안 읽었다. 괜한 질투심 때문이었을까. 참 못났다.
요새 글 쓰는 시간이 늘었다. 추석을 앞두고 며칠 전 박정민 책이 갑자기 읽고 싶더라. 이유는 글을 잘 쓰고 싶어서였다. 제목이 <쓸 만한 인간>이지 않은가. 평소 읽는 책은 에세이가 아닌데 내가 쓰는 글은 전부 에세이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잘 쓴 에세이를 찾던 중이었다. 마침 예전에 아내가 추천해줬던 <쓸 만한 인간>이 떠올랐다. 책장 속 <쓸 만한 인간>을 꺼내 들었다.
배우 박정민, 박정민이라는 사람
<쓸 만한 인간>은 배우 박정민이면서 동시에 인간 박정민이 쓴 책이다. 배우가 이래도 되나 생각할 정도로 지나치게 솔직하다. 지나친 솔직함에서 인간미를 느꼈다. 사람 냄새 풀풀 나는 구수한 느낌, 그런 걸 느꼈다. 동시에 읽는 내내 사람 박정민이 아닌 배우 박정민이 하는 이야기라고 전제를 두고서 읽었다. 연예인을 비롯한 공인에 대해 가진 환상을 지우고 그 사람을 바라보는 게 쉽지 않았다. 평소에 연예인들의 여러 뉴스를 통해 그들도 하나의 인격이고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 순간, 환상을 지워보지만 연예인에 대한 판타지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편견 없이 책을 읽어보려 노력했는데 실패했다. 배우 박정민은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에도 여전히 내게는 배우 박정민으로 남았다. 반면에 '배우 박정민도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게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쓸 만한 인간> 책갈피
대중문화 예술인답게 노래와 영화 제목과 가사를 활용한 문장들이 굉장히 재밌었다. 글자만 있는 책을 보는데도 음악이 들리고 영화 장면이 떠오르는 청각적이면서 동시에 시각적인 글이었다. 지나친 솔직함이 매력으로 다가오기도 했지만 일부 표현을 페미니즘 잣대를 대면 '박정민 배우도 어쩔 수 없는 한남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쓸 만한 인간, 몹쓸 사람. 또한 '나도 한남이지 뭐'라는 생각이 교차했다. 아쉬운 부분이지만 어쩌겠나. 그도, 나도 한국에서 태어났는걸. 이 책에 관한 유일한 아쉬움이다.
전체적으로 술술 읽히고 유쾌한 그리고 공감이 잘되는 책이었다. 가장 공감되었던 세 가지 이야기를 발췌하였다. 평가하는 태도, 덕이, 경청에 대한 이야기다.
자신의 전공에 있어서는 관대한 시각을 갖기가 대부분 어렵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연스레 틈을 찾고 흠을 찾는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나도 모르게 '이건 이래서 좋다.'보다 '이건 이래서 별로다.'를 기준으로 삼고 있었다. ... 문제는 그러다 보니 깐깐해지고 재수 없어지더라는 거다.
/p.128-129
내 문제는 전공 분야에만 이런 태도를 취한다는 데 있지 않다. 어떤 문제이든 이런 식으로 접근한다는 게 문제다. 큰 일이다. 하늘 높은 줄 알아야 하고 바다 깊은 줄 알아야 하는데. 모든 일에 판사가 되려는 이 오만한 마음을 어찌해야 할까.
밖에서 고생했을 덕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진다. 오랫동안 밖에서 먹고 잤을 녀석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너무나도 착한 눈으로 꼬리를 흔드는 이 녀석이 왜 버림을 받았는지 화가 나기도 한다. ... 입냄새가 진동을 하고 집 안에 각질이 부스스 떨어져 있어도 덕이의 평생 좋은 친구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조금 말썽을 피워도 가끔 우울감에 토라져 있어도 전부 다 안아 줄 수 있을 것 같다.
/p. 156-157
내가 썼다고 하고 싶을 정도로 내 마음을 잘 표현한 문장들이었다. 박정민 배우에게 정말 고마웠다.
'그냥 들어준다.'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면 나도 모르게 '다음을 듣고 맞는 것을 고르시오.'식의 듣기 평가를 하고 있다. 듣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맞는 것을 고르는 게 중요해졌다.
(중략)
"..."의 침묵과 "그랬구나. 가끔은 그럴 수 있어."의 동의가 필요한 순간인데 말이다.
/p. 168-169
그냥 들어주는 게 중요한 걸 알면서도 그리 어렵다.
'쓸 만한 인간'
책을 다 읽고 나서 제목을 다시 보니 <쓸 만한 인간>이다. 나는 사회에서 쓸 만한 인간인가, 글을 쓸 만한 인간인가. 골똘히 고민했다. 누군가 나에게 쓸 만한 인간인지 증명해보라고 한다면 사실 속이 막막해지는 부분이 있지만, 적어도 책을 읽는 동안에는 '나는 쓸 만한 인간이다.'라고 위안 삼게 해주는 그런 책이었다. 나는 쓸 만한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