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십일조와 현대인의 십일조
나의 십일조 이야기
십일조 하면 떠오르는 책이 있다. <십일조의 비밀을 안 부자 록펠러>라는 책이다. 거부 록펠러에 대한 이야기다. 십일조의 비밀을 알려주는 책 같아 보이지만, 아니다. 부자가 된 록펠러의 비밀을 알려준다. 그 비밀은 이미 제목에 나와 있다. 십일조다. 부동산이 아니다. 주식도 아니다. 금도 아니다. 인맥도 아니다. 거부가 될 수 있었던 비밀은 십일조다. 이쯤 되면 종교보다 경제경영으로 분류해야 한다.
신실한 신앙을 갖기 원하는 혹은 신실한 신앙인으로 인정받고 싶은 사람들에게, 교회가 요구하는 것들이 있다. 주일성수, 십일조, 수요 예배, 새벽 예배, 교회 내의 갖가지 봉사들이다. 십일조와 주일성수는 이 수많은 단계들 중 입문 단계에 불과하다. '나 교회 좀 다녀'라고 말하려면 가져야하는 디폴트 값이라고 해야할까.
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 말라기 3:8-10
십일조 설교에 자주 등장하는 게 말라기 구절이다. 십일조에 대한 여러 구절이 있지만 말라기 구절은 화룡점정이다. 십일조를 내지 않는 건 도둑질이고 온전한 십일조를 내면 복을 부어준다. 당근과 채찍이 함께 나오는 조화로운 구절이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십일조를 냈다. 용돈 5만 원을 받으면 5천 원은 주일에 반드시 냈다. 가끔 백 원 단위로 십일조 금액이 나올 때가 있었다. 하나님께 쪼잔해 보이기 싫어 올림 처리하여 천 원 단위로 냈다. 그런 십일조 신앙을 갖게 된 배경은 당시 교회에 있었다. 목사님은 거의 매주 십일조에 대한 이야기를 설교 중에 끼워 넣었다. 정확히 말하면 헌금 이야기인데, 솔직히 말하면 돈 이야기다. 간간히 십일조를 주제로 정하여 집중적으로 설교했다. 사실 십일조를 잘 내는 나에게는 필요 없는 보충수업 같은 느낌이었다. 이는 십일조를 제대로 내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물론 나같이 십일조를 잘 내는 사람들에게 세뇌 교육 차원에서도 밑질 설교는 아니었다. 그 당시 십일조 설교는 당근과 채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채찍질이 좀 매서웠다. 십일조를 내지 않아 교통사고를 당해서 병원비를 십일조로 대신했다는 성도의 사례, 십일조를 내지 않아 사업이 망하고 패가망신한 사연들이었다. 몸이 경직된 채로 들어야하는 두려운 이야기들이었다. 당근 설교는 매혹적이었다. 십일조가 아니라 믿음의 십이조를 드렸더니 연소득이 2배가 올랐다는 성도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십일조를 잘 드리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니 취업이 잘되고 사업이 잘되는 이야기도 들려줬다. 돌려받는 러시앤스틸 하나님의 이야기와 금도끼 은도끼 하나님의 이야기를 통해 카멜레온 매력을 지닌 하나님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연스레 십일조를 꾸준히, 정직하게 냈다.
명절 때면 내 십일조는 늘어났다. 평소 받는 용돈만큼 십일조를 냈다. 내면서도 행복했다. 50만 원 중 5만 원 내도 45만 원이니까. 굉장한 믿음이다. 가끔은 이발소에 찾아온 아버지 친구로부터 용돈을 받을 때도 있었다. 3만 원, 5만 원. 그 주엔 십일조가 늘어나는 것이다. 뭐, 이 정도는 내 입장에서 ‘시험’ 축에 끼지도 못했다. 그러던 중 시험이 찾아왔다.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성적우수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당시에 장학금을 현물로 지급하는 게 아니라 다음 학기의 등록금 중 일부를 제하는 형식으로 지급되었다. 고민이었다. 십일조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당시 내 입장에서는 내지 않아도 될 헌금을 내는 느낌이었다. 시험에 든 것이다. 결국 타협했다. 감사헌금으로 적당히 낼 수 있는 만큼 냈다. (감사헌금도 종류가 매우 많은데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뤄보도록 하겠다.) 이상하게 헌금을 내었는데도 찝찝함을 느꼈다. 십일조 금액을 정확히 냈어야 했나 보다.
직장인이 되니 십일조가 더 늘어났다. 시험의 강도가 높아졌다. 십일조의 액수에 따라 시험에 들기도 했지만 복잡한 십일조 셈법에 시험이 들기도 한다. 연말정산이 끝나면 일정 금액을 토해내거나 돌려받는다. 돌려받으면 십일조를 내야 하지만 토해내야 할 경우는 십일조를 내지 않아도 됐다. 어렸을 때 그랬듯이 하나님 앞에 쪼잔한 신앙인 되기 싫어서 좀 더 얹어서 냈다. 사실 귀찮기도 했고 시간을 아낄 수 있어서 십일조를 조금 더 내는 게 그리 손해 볼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십일조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 이스라엘 백성이 정복한 가나안 땅, 곧 요단 서쪽의 땅은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각 지파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분배되었다. 이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 땅을 제비 뽑아 나머지 아홉 지파 반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들은 모세가 두 지파 반에게는 이미 요단강 동쪽의 땅을 분배해 주었기 때문이다. (요셉의 자손은 므낫세와 에브라임 두 지파로 나누어졌다) 그러나 레위 지파에게는 거주할 성과 가축을 기르는 목초지 외에 나누어 준 땅이 없었다. (수 14:1-3)
-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신 26:12)
- 너는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와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과 네 서원을 갚는 예물과 네 낙헌 예물과 네 손의 거제물은 네 각 성에서 먹지 말고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는 네 자녀와 노비와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함께 그것을 먹고 또 네 손으로 수고한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되 너는 삼가 네 땅에 거주하는 동안에 레위인을 저버리지 말지니라 (신 12:17-19)
- 레위 자손이 성막에서 일하는 대가로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십일조를 그들에게 주겠다. ...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레위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너희 유산으로 준 십일조를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받으면 그것의 십일조를 다시 나 여호와에게 예물로 바쳐라. ... 이와 같이 너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받은 십일조 가운데서 나에게 예물을 바치고 나에게 바친 이 예물을 제사장 아론에게 주어라. (민 18:23,25,28)
-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 네 성읍에 거주하는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이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 (신 14:23,27)
여호수아는 12지파에게 가나안 땅을 배분했다. 당시 레위 지파는 땅을 배분받지 못했다. 12지파의 십일조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함이다. 땅을 배분받지 못한 레위 지파에게 레위 지파는 땅을 물려받지 못한 대신 성막에서 일을 했고 이스라엘 각 지파의 십일조를 받았다. 그리고 레위 지파는 각 지파로부터 받은 것들 중 가장 좋은 것을 구별하여 십일조를 다시 제사장 아론에게 주었다. 문자적으로 해석해보면 결국 최고급 상태의 소산물은 제사장 아론이 받는다.
여기서 재밌는 상상을 하나 해볼 수 있다. 만약 12지파의 소산물이 모두 1이라면 각 지파의 1/10을 받게 되는 레위 지파는 총 12/10(1.2)을 획득하게 된다. 레위 지파는 가장 많은 소득을 얻게 된다. 레위 지파의 십일조는 제사장의 몫이었다. 제사장의 몫은 0.12다. 아론에게 바쳐진 십일조는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궁금하다. 성경을 좀 더 유심히 찾아봐야겠다. 어쨌든 인구 대비 가장 많은 몫은 제사장이 가져간다. 그리고 다른 지파에 비해 성막에서 일하는 레위 지파의 몫이 다른 지파의 소산물 양보다 많다.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하면 성막에서 일하는 제사장 집단이 차지하는 소산물의 몫이 다른 지파에 비해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앞서게 된다. 그리고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모든 신앙을 모두 폄하할 수 없지만 위와 같은 성경적 배경이 한 때 신학교 열풍이 부는 데 한몫하지 않았을까. 지금 목사들 중 교회 내 최고 계급이 누리는 혜택을 욕망한 이들이 과연 없었을까.
제사장 직분을 받은 레위 사람들은 같은 동족인 아브라함의 후손에게서 10분의 1을 받도록 율법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히 7:5)
너희가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해질 것이다. 바리새파 사람들아, 너희에게 불행이 닥칠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운향과 온갖 채소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정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저버렸다. 그러나 십일조도 바치고 이것도 버리지 말았어야 했다. (눅 11:41-42)
신약에서도 십일조가 나온다. 하지만 구약만큼 자주 나오지 않을뿐더러 예수와 바울의 메시지들을 분석해보면 십일조에 방점을 찍지 않았다. 왜 유독 목사들은 십일조에 집착하는 걸까? 심지어 신약 예수는 급진적이다. 십일조가 아니라 네 재산을 다 팔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눈 후에 자신을 따르라고 명했다. 목사들이 재산을 다 팔고 예수를 따르라고 설교하지 않고, 십일조를 교회에 내라는 이유에 대해서는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십일조에 집착하는 교회, 이유는?
십일조의 대부분은 어디에 쓰일까? 이는 헌금의 대부분이 어디에 쓰이느냐는 질문과 같다.
첫째로 십일조는 건물 유지비로 사용된다. 작은 교회들은 건물 임대료를 내는 데 대부분의 헌금이 쓰이고 큰 교회들은 무리하게 건축하면서 생긴 은행 부채를 갚는 데 헌금을 사용한다. 한국교회의 부채가 어마어마하다. 이미 10년 전부터 교회의 은행 부채에 대한 이야기는 늘 있어왔다. 2012년 금감원 자료에 의하면 1,2 금융권을 합쳐 교회 대출 규모가 10조에 육박했다. 연리 5.5~6.5%로 계산하면 매달 나가는 이자만 600억이 넘는 실정이었다. 내가 다니던 고향교회도 교회를 건축한 지 10년이 지난 후에서부터야 원금을 갚기 시작했다. 8년이 지난 2020년, 지금은 많이 달라졌을까? 한국교회는 십일조가 절실히 필요하다. 부자의 십일조도 필요하고 빈자의 십일조도 필요하다. 영혼을 끌어 모아 빚을 갚아야 하는 시기다. 그래서 교회는 매주 말한다. 십일조는 의무라고.
둘째로 십일조는 목회자들을 위해 사용된다. 오늘날의 레위인에게 사용된다. 그런데 짚어볼 게 있다. 오늘날의 목회자들이 과연 성경에서 말하는 레위인인가? 근본주의자들은 ‘레위인=제사장=목회자’이라 주장한다. 현실은 그러하지 않다. 빚을 갚아가는 데 허덕이면서도 담임목사를 위한 차는 고급차량으로 준비한다. 담임목사와 교역자의 월급 또한 결코 적은 수준이 아니다. 퇴직금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다. 이런 데도 그들이 레위인인가?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07266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06318.html
구약에서 말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는 누구인가. 신약에서 말하는 가난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사회적 약자다. 비인간동물, 코로나로 인한 실직자, 장마로 인해 피해를 입은 농가, 편안히 잠들 수 있는 집이 없는 자, 사회에서 배제된 성소수자, 여성, 독거노인, 장애인, 착취당하는 노동자, 억울한 죽음과 고통을 당하는 이. 이들 모두가 구약에서 말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다. 사회를 잘 둘러보아라. 공동체를 유심히 지켜보라. 누가 약자인가. 교회의 곳간을 잘 들여다보라. 당신의 십일조가 어떻게 쓰이는지. 목회자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진 않은가. 화려한 건축물 부채를 갚는 데 쓰이고 있지 않은가. 교회 내부적으로 십일조에 대한 제대로 된 가르침이 필요하고 성도 스스로 공부와 성찰이 필요하다. 십일조를 교회에 바치지 말라. 사회적 약자와 나누라. 주변을 살피라.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주변을 살피지 않는 교회라면 당장 떠나라. 떠나면 보일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고 십일조가 필요한 이들과 함께 십일조를 나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