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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 Jul 01. 2021

한국의 도시는 근대 도시가 아니다?

<도시의 자격>을 읽고...

나는 <도시의 자격>을 읽으며 공감하기도 했고 의문이 생기기도 했다. 이 글을 통해 <도시의 자격>에 나온 내용 중 도시의 탄생과 도시 빈곤 문제에 대해 논하고 도시계획가의 필요성과 시민이 도시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도시의 자격> 저자는 머리말에서 도시와 도시계획에 대한 7개의 OX 퀴즈와 3개의 객관식 문제를 던진다. 나는 간신히 절반을 넘겼다. 나만 그랬을까? 아래 세 가지 문장의 OX를 답해보자.


‘런던, 파리, 서울은 자연스럽게 발생한 도시가 아닌 인위적으로 만든 신시가지(new town)였다.’

‘상하이는 오래된 역사 도시다.’

‘30년 전 서울 인구의 절반 이상이 최저주거기준에 미달하는 주택에 살았다.’


우리는 도시에 살지만 정작 도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저자가 이 책을 펴낸 이유는 익숙한 ‘도시’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천천히 살펴보기 위함이다.


도시를 바라보는 패러다임은 세 가지가 있다. 도시사, 도시형태사, 도시계획사. 도시사는 역사가 중심이 되고 도시는 역사의 무대로 등장한다. 도시형태사는 성, 성곽, 기념물 등 물적 특성을 주로 다룬다. 도시계획사는 사람과 사회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기반을 중심으로 다룬다. <도시의 자격>은 1부 도시의 역사, 2부 도시계획의 역사를 다룬다.


도시란 어떻게 만들어질까?

영국과 미국에서 도시가 되는 과정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영국의 도시는 지역의 청원에 따라 심사를 거쳐 여왕이 하사한다. 미국의 도시는 지역 주민들이 자치 활동을 진행하고 주정부에 도시가 되기 위한 청원을 진행한다. 청원 후에는 타당성을 검토한다. 다양한 요소를 고려하지만 공공재정이 주요 검토 요소다. 검토 후에는 선거를 치르고 지방정부 조직을 수립하고 시 공무원을 채용하고 조례를 재정한다.


대한민국은 어떨까? 대한민국 도시는 영국과 미국과 같은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인구 규모 기준으로 5만 명 이상이면 자치 의사와 역량과는 무관하게 자동으로 도시로 승격된다. 여전히 ‘시민에 의한’ 도시는 아닌 것이다. 한국은 시민이 도시를 만들어 갈 기회가 없었다. 시민들이 도시를 만들어갈 의지가 없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한국전쟁과 이후 독재자들에 의해 시민이 도시를 만들어갈 기회 자체가 없었다고 보는 게 훨씬 더 타당하다.


아테네 도시 ⓒ unsplash


저자는 도시를 1기에서 7기까지 구분한다. 1기는 성소와 신전 같은 장소, 2기는 수메르와 같은 촌락 도시, 3기는 아테네와 같은 도시국가, 4기는 제국과 종교의 지배 거점인 제국 도시, 5기 자유 시민 도시, 6기 지방자치체, 7기 세계 네트워크 결절점. 저자는 앞서 언급했던 영국과 미국의 사례는 5기 이후의 도시에 해당하고 한국은 4기에 머물러 있다고 평가했다.


도시의 본질과 다르게 도시는 자본가들의 사익 추구 수단이 되었다

저자는 2기에서 4기까지 주요 경제기반은 농업이었고 농업 기반의 사회에서 더 많은 경제적 이득을 얻는 방법은 약탈과 폭력이라고 말한다. 반면 5기 이후 주요 경제기반은 교환이었고 교환을 통해 분업화되고 전문화되어 과거에 비해 폭력이 많이 줄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나의 생각은 다르다. 첫째, 교환 때문이라는 이유만으로 폭력이 줄어든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도시에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윤리와 시민 의식이 발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서로의 안전을 위해 타인을 해치는 행위에 대한 윤리 의식이 생겨나고 이와 함께 법과 같은 제도들을 통해 약속 체계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폭력은 줄어들었다. 둘째, 5기 이후 주요 경제기반은 교환이 아니라, 착취라고 생각한다. 도시는 성장했고 경제는 발전했고 산업은 분업화되고 전문화되었다. 이로 인해 관리하는 계층이 생겨났다. 보통 자본가들이 이 역할을 맡게 되는데 이들은 분업화되고 전문화된 체계에서 노동력을 착취한다. 관리 계층은 생겨날 수밖에 없지만 관리 계층의 수익 비율이 커지는 데에 문제가 있다. 착취가 도시성장의 필요충분조건이라면 성장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며 그렇지 않다면 착취 없는 도시성장을 이뤄야 한다.


“도시 노동자들의 열악한 생활환경은 원인으로 마르크스는 도시 자체를 꼽았다. 도시가 곧 병폐이자 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도시 그 자체가 자본가들의 사익 추구의 도구이며 노동자들의 이익은 도시를 통해 더욱 나빠진다고 보았다. 나아가 도시는 농촌을 착취하는 존재로 인식하였다. 이런 막연한 생각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이데올로기 시대를 거치면서 공고해졌고, 때로는 조장되었다. 따라서 이런 문제에 대한 이상주의적 해결 방안은 도시를 해체하는 것이었다.”
- 17p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도시가 착취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언급했다. 도시를 해체하는 것은 적절한 해결 방안이 아니며 도시가 농촌을 착취하거나 도시 때문에 노동자들의 이익이 나빠진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착취의 문제 해결 방안이 도시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견에는 동의한다. 도시 자체는 중립적이다. 도시 자체가 악은 아니었고 도시가 노동자를 착취한 건 아니었지만 도시를 수단으로 하여 자본가는 노동자의 이익을 착취했다. 또한 도시는 농촌을 착취하고 있다. 농산물 원가에 비해 도시에서 판매되는 정가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한국일보에 따르면 농가에서 생산한 700원의 양파는 도시 소매점에서 4200원에 판매된다. 적게는 5단계, 많게는 7단계를 거쳐 유통이 된다. 물론 유통 과정에 해당하는 운송업체 보관업체, 도매업체 등의 수익을 고려하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각 유통 과정에서 노동자의 수익이 보장되는 게 아니라 유통을 관리하는 업체들이 더 많은 수익을 가져간다는 점이다. 게다가 요즘은 유통과정을 일원화하여 대기업에서 관리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실에서도 도시가 농촌을 착취한다는 생각이 막연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도시 만들기와 도시 빈곤 문제 해결은 구분 지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

도시는 영국과 미국의 사례와 같이 시민이 만들어 가야 한다. 예를 들면 내 집과 집 앞 도로는 누가 만들어야 하는 걸까? 바로 내가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해선 안 되는 상황이 있다. 도시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과거에 토지는 공유재와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사유재산이 되어 토지주가 있다. 필지가 구획되고 주인이 있다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누군가는 넓은 면적의 토지와 여러 채의 건물을 소유하고 있고 누군가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도시에 사는 빈곤한 이들의 능력이 부족한 탓인가? 아니면 노오력이 부족했던 걸까? 빈곤의 책임을 개인에게만 떠넘겨서는 안 된다.


온정주의적 발상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잘난 사람이 못난 사람에게,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에 머무른다는 근본적 한계를 갖는다. 또한 윗사람과 아랫사람이라는 수직적으로 고착화된 계층적 사회체계를 당연시한다는 점에서도 한계가 있다.
- 182p


틀린 말은 아니다. 저자는 모두가 노력하면 스스로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과 온정주의는 구분해야 하며 온정주의적 발상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도시철학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온정주의적 발상의 위험성을 지적한 저자의 논리는 기득권이 구축한 구조를 더욱 단단히 하기 위한 논리로 사용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지금처럼 양극화가 심각한 상황,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빈곤한 이들을 위한 적절한 지원과 대책이 필요하다.



근본적으로 빈곤이란 돈이 없는 것이다. 각 사람에게 최소 소득 또는 보편적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것이 빈곤과 싸우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다.
<도시는 왜 불평등한가> / p.312


온정주의적 발상이 경제적 지원에만 그쳐서는 안 되겠지만 빈곤층에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자본주의의 착취 구조와 양극화 문제를 완화하는 수단이며 부의 재분배 과정이다. 이는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경제적 지원과 함께 노력으로 사회적 계층을 이동할 수 있는 교육적, 제도적 지원이 함께 수반되어야 한다. <도시는 왜 불평등한가>의 저자 리처드 플로리다는 장소중심 접근법으로 학교에 투자하고 필요한 사회서비스를 제공하고 범죄와 폭력을 줄이는 것으로 지역 환경을 개선하는 ‘장소중심 접근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계층 이동에 필요한 일종의 사다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어떤 도시계획가가 필요한가?

최근 LH 투기 사건과 재개발 이슈 등을 보며 도시계획가의 전문성에 대해 고민해보게 된다. 저자의 역서 <UN-Habitat의 리더들을 위한 도시계획 개론> 서문에서 역자는 도시계획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도시계획의 목표는 첫째 경제적 풍요를 이루고, 둘째 환경적 부담을 줄이며, 셋째 이로부터 발생하는 혜택을 시민 모두가 골고루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정의를 이루는 것이다. 여기에 더 하여, 위 세 목표들을 통합하여 적절한 균형과 조정을 달성해야 하는 네 번째 목표가 추가된다.”
<UN-Habitat의 리더들을 위한 도시계획 개론> 역자 서문중


도시계획가는 전문성을 발휘하여 네 가지 목표를 모두 달성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무언가를 포기되거나 무시된다. 상황에 따라 목표 달성에 대한 전략이 달라진다. 지금 이 시대는 무엇이 더 필요한 시대인가. 경제적 풍요가 더욱 필요한 시대인가? 환경을 파괴하고 사회적 정의를 저버리면서까지 경제적 풍요를 달성해야만 하는가? 우리는 어떤 가치에 가진 자원을 적절히 투입할 것인가 깊이 고민하는 도시계획가가 필요하다.



시민이 도시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

도시계획사는 역사에서 도시가 해결하고자 했던 과제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본다.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습득하기 위함이 아니다. 역사를 통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를 위한 지혜를 얻고자 함이다. 도시를 공부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도시가 지닌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은 도시를 만들기 위함이고 결국 도시에 사는 시민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시민들이 더 나은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이다. <도시의 자격>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문제의 명쾌한 답을 제시해주진 않는다. 하지만 도시에 대한 깊은 사유를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제목은 <도시의 자격>이지만 사실 저자가 이야기하려던 것은 '시민의 자격'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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