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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 Oct 11. 2022

북한산과 종로를 잇는 여행 '쇼트레카'를 아시나요

조금 특별한 서울을 경험하고 싶은 이들을 위한 등산코스 #1

정릉천을 걸어가는 중이었다. 내 앞을 걸어가는 이와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이의 어깨가 부딪혔다. 두 분 다 연세가 지긋하신 노인이었다. 노인의 세계에도 '어깨빵'이 존재하는구나. 반대편 노인은 고개를 돌려 날 선 눈빛을 쏴 붙였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정작 어깨가 부딪힌 노인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동행하던 노인이 넉넉한 미소와 함께 대신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건넸다.


자세히 보니 'OOO 산악회'라는 리본이 붙어 있다. OOO 산악회는 시각장애인 등산 동호회다. 시각장애인과 산행을 도와주는 자원봉사자로 구성되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시각장애인이 등산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아마도 볼 수 없다는 장애 때문에 등산을 즐기기 힘들다는 편견도 한몫했을 테다. 나의 무지와 편견에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산을 시각으로만 즐기는 건 아니지 않은가. 봄과 여름에는 초록빛 새 생명을 후각으로 느낄 테고 새소리와 냇가 소리는 BGM이 되어줄 테다. 가을에는 떨어진 낙엽, 겨울에는 쌓인 눈을 밟는 즐거움을 누릴 테다. 계절을 막론하고 흙과 바위를 밟는 촉감이 가슴을 뛰게 할 것이다.


책 속에서는 배울 수 없는, 세상에 나와서 함께 숨을 쉬어야만 깨달을 수 있는 것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산에 오르기 전에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으니 하산해도 되겠다. 그러나 청명한 하늘과 바위뿐만 아니라 모래알까지 비치는 정릉천의 풍경은 산에 대한 기대를 더욱 증폭시켰다.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산으로 향하는 이도, 산에서 내려오는 이도 많았다. 바야흐로 등산의 계절.


친구는 출출했는지 김밥집에 들러 참치김밥 한 줄과 일반김밥 한 줄을 주문했다. 일반김밥에는 햄과 계란을 빼 달라는 부탁을 드리자 사장님은 '비건'이냐고 물으며 어묵도 빼냐고 물었다. 빼 달라고 요청했더니 사장님은 "진짜 비건이신가 보네"라고 답하며 김밥을 싸줬다고 한다. 이럴 때에야 비로소 '비건'이라는 삶의 양식이 생동하고 있음을 느낀다.


북한산 형제봉 아래서 바라보는 서울 전경이 주는 위로


이번 트레킹 코스는 형제봉에만 들렀다가 오는 게 목표. 정릉탐방센터에서 출발하여 형제봉을 경유한다는 것만을 정하고 트레킹을 시작했다. 탐방센터 입구에서 보이던 그 많은 인파는 등산로에서 보이지 않았다. 이유는 형제봉에 올라서야 알 수 있었다.


형제봉 높이는 각각 해발 461m, 463m. 쉬엄쉬엄 걸으니 약 두 시간 정도 걸렸다. 형제봉에 오르자 먼저 도착해있던 중년 부부가 마치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뜬금없지도, 불편하지도 않았다. 넌지시 약간의 불평을 늘어놓으며 이 코스에 관해 우리가 잘 알고 있다는 투로 너스레를 놓았다. 부부는 일주일 전에 설치된 데크 계단과 펜스 때문에 이 코스가 이전보다 재미없어졌다고 한다. 하긴 산행하기엔 더 편해졌을지 몰라도 새로 산 등산화가 제값을 못하는 것만 같아 아쉽기도 하다. 물론 안전을 위해서 만들었겠지만 말이다.


어떻게 이리 잘 아시냐고 물었더니 "우리는 여기에 매주 와요"라고 대답하셨다. 매주 왔으니 잘 알 수밖에. 주말에 백운대 근처로 등산을 가면 앞사람 꽁무니만 보고 산에 올라야 하는데, 이 코스는 주차하기도 좋고 주말에도 사람이 많지 않아서 트레킹 하기에 좋은 코스라고 아낌없이 정보를 내주었다.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부부는 우리에게 사진을 찍어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우리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진 촬영 이후 우리도 부부의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말했지만, 부부는 이미 너무 많은 사진을 찍었다며 '즐거운 산행 하시라'는 인사말을 남기시고 먼저 형제봉을 떠났다.


산에 오를 때면 처음 보는 이들과 이렇게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누곤 한다. 처음 보는 사람과도 대화를 잘 나누는 성향 탓이기도 하겠지만, 산 아래에서는 잘 벌어지지 않는 순간들이라 이런 날이면 산행이 더 특별하게만 느껴진다.



서울 산행이 다른 지역 산행과 다른 점이 있다면, 대한민국 가장 큰 도시를 내 발아래에 둘 수 있다는 것일 테다. 형제봉에 오르자 오른편에는 평창동을 비롯해 종로구와 은평구 일대가, 왼편에는 성북구와 노원구 일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서울의 굽이굽이 높고 낮은 산 그리고 한강과 대교가 보였다. 고층빌딩과 아파트는 레고 장난감처럼 손가락으로 이리저리로 옮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도로 위 점만 한 크기의 자동차는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이리도 별 것 아닌 것들이 현실에서는 얼마나 높고 크고 빠르게 느껴지는지. 산에만 오르면 이상하게 자신감이 생기고 위로가 되는 건 그 모든 걸 장난감 레고 크기로 만들어놓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서울 부촌 평창동에서 부암동으로


열심히 하산했더니 으리으리한 고급 주택들이 보이는 동네에 도착했다. 평창동이다. '정선곤드레쌈밥'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채식을 지향하는 이들이 먹을 수 있는 메뉴는 곤드레밥 + 된장찌개 세트와 메밀전. 곤드레밥은 솥밥에 나오는데 식사 후 누룽지를 먹을 수 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부암동까지 자전거를 타고 이동했다. 부암동은 높은 언덕에 위치한 아주 특이한 지형에 놓인 동네다. 실제로 부암동에 가면 이 오르막길을 좋아하는 자전거 마니아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청와대와 매우 가깝고 김신조가 침입을 했던 경로 중 일부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4소문의 하나인 창의문이 있고 북악산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다. 미술관과 갤러리가 있고 무료로 관람이 가능한 윤동주문학관이 있다.


부암동은 내가 서울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는 동네다. 살던 동네는 아니지만 살던 동네만큼이나 애정이 가는데 아마도 7개월 동안 단독주택 시공 현장관리인으로 일했던 동네였기 때문일 테다. 슈퍼, 편의점, 식당, 베이커리, 주민센터, 카페, 철물점 등 들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특색 있는 카페와 소규모 상점들이 곳곳에 자리를 잡았다. 비건을 지향하기 전에는 통닭집과 돈가스집을 자주 갔다. 일본식 경양식 '맘스키친'과 초밥집 '나뭇잎스시', '가미'도 합리적인 가격으로 괜찮은 식사를 할 수 있다. 카페 소마는 조용하게 커피를 마시기에 좋은 아늑한 장소다. '묘한빵집'의 식빵도 맛있고 지금은 너무나 유명해진 스코프의 '스콘'도 맛있다. '자하손만두'에서 부암동 전경을 바라보며 먹는 만두도 일품이고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 촬영지인 '산모퉁이' 카페에서 바라보는 부암동 풍경도 예술이다. 아쉽게도 부암동에는 비건이 먹을 수 있는 식당은 아직 없는 것 같다.


부암동은 드라마와 영화와도 꽤 인연이 깊다.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커피프린스 1호점 촬영지 카페가 있고 최근에는 영화 기생충을 촬영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이날은 부쩍 인파가 몰린 듯했다.


부암동과 평창동은 대부분의 부지가 개발제한구역이다. 건축행위가 가능한 지역도 제1종전용주거지역과 제1종일반주거지역이라 고밀고층의 건축 행위가 불가하다. 아마도 부암동만의 특색 있는 분위기는 건물들이 인근의 북한산과 북악산과 잘 어우러지기 때문일 테다. 이곳에 고층 건축물이 들어선다면 부암동은 곧바로 그 매력을 잃어버릴 테다. 천혜의 풍경이 다 가려질 테니 말이다.


초록빨(?) 제대로 받은 인왕산 더숲 초소책방


리모델링 이전 초소의 모습과 리모델링 이후 초소책방 © 종로구

윤동주문학관을 끼고서 한양도성길이 있다. 그 길을 쭉 따라가면 인왕산에 오를 수 있다. 극한을 맛보겠다면 말리지 않겠다. 윤동주문학관에서 약 20분을 걸으면 인왕산 더숲 초소책방이 나온다. 이곳은 원래 김신조 사건 이후 청와대 방호 목적으로 건축한 경찰초소다. 2018년 인왕산 전면 개방에 따라 서울시와 종로구가 초소를 리모델링했다. 공사가 진행될 때도 굉장히 관심이 갔는데 카페를 기반으로 한 복합문화공간으로 멋지게 탄생한 걸 눈으로 목격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 정도면 김신조 사건이 부암동 로컬 콘텐츠의 한 축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장소는 자연이 만든 초록 아웃테리어가 모든 걸 다한 공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개방감 있는 통유리로 마감하여 사면의 초록색이 평온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야말로 초록빨을 제대로 받은 건축물. 이렇게 멋진 자연 맥락이 녹아든 장소에 건축물이 건축상을 타는 건 크게 놀랄 일은 아닌 것 같다. 서울시 건축상 우수상, 대한민국 목조건축대전 대상을 수상했다.


초소책방에는 책을 판매하기도 한다. 콘셉트는 환경인가 보다. 비건, 제로웨이스트, 환경 관련 도서들이 보였다. 디저트와 음료는 특별히 비건 옵션이 있진 않다. 커피와 두유, 주스 정도가 비건이 마실 수 있는 음료. 도서 선정처럼 디저트와 음료도 비건 콘셉트 가져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 대목이다. 주말에는 프리마켓이 열려 의류와 잡화를 판매하기도 한다.


서울 도심과 산을 넘나드는 따뜻한 여행 '쇼트레카'


초소 책방에서 5분 정도 걸으면 수성동계곡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수성동계곡을 통해 서촌으로 갈 수 있다. 서촌이야 워낙 분위기 좋은 거리로 유명하니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두 개의 가게를 소개하고 싶다. 첫 번째 가게는 '서촌 동양백화점'. 양말 가게다. 예쁘고 귀여운 양말들 천지다. 몇 천 원으로 기분이 확 달라질 수 있다. 자기 자신이나 생각나는 지인의 선물을 가벼운 마음으로 준비해봐도 좋겠다.

두 번째 가게는 희. 송파에 살고 서촌이 좋아서 가게를 열었다는 희. 감동적인 가게다. 희는 어린이를 위한 가게다. 간섭하지 말라는 말이 다소 강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이보다 사실을 잘 드러내는 단어가 있을까. 성인은 어린이들을 비롯해 청소년들에게도 지나친 간섭과 통제를 하는 경향이 있다. 어린이들은 그들의 시각과 취향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고 싫어하는 것은 거부할 권리가 있다. 성인의 시각과 관점으로 그 권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희가 던진 메시지를 곰곰이 곱씹다 보니 자연스레 가게 앞에서 오래 머물게 되었다. 옆에서 살 물건을 고르는 어린이와 부모의 대화를 엿듣는 것도 내게는 너무나 즐거운 일이었다. 어린이가 고래가 그려진 물건을 고르고 자리를 떠난 후 내가 그 자리를 채웠다. 여름은 이미 지났지만 청량해 보이는 여름용 반지를 하나 샀다. 내년 여름을 기다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걸음 수를 체크해보니 총 2만 1천 보. 형제봉에서 만난 중년 부부와의 우연한 만남도 즐거웠고 친구와 편안하게 나눈 대화도 기억에 남는다.


정릉탐방센터에서 북한산국립공원의 형제봉, 평창동, 부암동, 초소책방, 서촌까지. 가벼운 마음으로 이리저리 다니며 가슴에 기억의 돌 하나를 쌓았다. 트레킹과 쇼핑 그리고 카페에서 여유로운 음료 한 잔까지. 도심에서 산으로, 다시 산에서 도심으로. 일명 '쇼트레카', 서울의 도심과 산을 넘나드는 완벽한 여행이었다. 북한산을 터널 삼아 걷기의 즐거움과 인간 세상의 따뜻함을 충분히 누린 하루였다.


조금은 특별하게 서울을 걸어보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해볼만한 등산 코스다. 아, 한 가지 팁이 있다면 주말을 피해서 가야 여유롭게 충분히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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