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4월 24일은 '세계 실험동물의 날'이다. 지난 24일 한국동물보호연합은 광화문에서 동물실험 중단을 위한 기자회견을 개최하며 '고통 E등급 동물실험 중단'을 촉구했다.
세계 실험동물의 날은 1979년 영국 동물보호단체 'Natioal Anti-Vivisection Society(이하 NAVS)'에서 제정하여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동물실험의 잔인함과 불필요성을 알리고 연구와 실험 분야에서 동물실험을 없애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동물실험은 의학이나 수의학에서는 의학 기술을 가르치는 데 쓰이고 과학 분야에서는 해부용으로 쓰이기도 한다. 필자가 동물권 활동을 하면서 단 한 번도 마주해보지 못한 동물이 바로 실험동물이다. 반려동물이야 길거리에서 쉽게 마주할 수 있고, 전시동물은 동물원에서, 농장동물은 농장이나 도살장 앞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 반면 실험실이라는 공간의 폐쇄적인 특성상 실험동물을 볼 수도, 실험동물 이야기를 들을 수도 없었다.
동물실험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도 살아 있는 동물에게 실험을 했고, 13세기 아랍 의사였던 이븐 알 나피스(Ibn-Al-Nafis)도 살아 있는 동물을 해부한 덕에 순환계를 알아냈다. 이후로 17세기가 되어 야생동물, 농장동물, 고양이 개 등을 실험동물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의학 연구의 한 영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기술의 발전과 진보는 셀 수 없이 많은 동물의 목숨을 짓밟고 켜켜이 쌓아온 역사의 산물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약, 의학 기술, 화장품까지 동물실험을 거치지 않은 것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동물실험의 3R 원칙
국내 동물보호법에 따르면 동물실험시행기관은 동물실험윤리위원회를 설치하고 운영해야만 하며, 동물실험은 3R 원칙을 준수해야만 한다.
3R 원칙은 1950년대 말 Russel과 Burch에 의해 정의되었다. Replacement(대체), Reduction(감소), Refinement(개선)를 뜻한다. 동물실험의 대체방법을 고려해야만 하며 사용 동물의 수를 감소해야 하고 실험방법을 개선해야만 한다. 동물 생명의 존엄성을 고려하고 고통을 줄이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동물실험에 사용하는 종은 다양하다. 설치류, 개, 고양이, 돼지, 소를 비롯한 포유류, 토끼, 원숭이, 조류, 파충류, 양서류, 어류가 있다. 그중 마우스, 기니피그를 비롯한 설치류가 가장 많이 이용된다. 개체의 크기가 작고 생식 주기가 짧으며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싸기 때문이다.
고통으로 매긴 실험동물 등급... 그중 45%가 극심한 고통에 해당하는 E등급
현행 제도에서는 동물에서 유발될 수 있는 고통을 다섯 등급으로 구분한다. 고통등급 A는 사체 혹은 동물의 조직 일부, 배아 또는 계란을 이용한 실험이다. B는 척추동물을 대상으로 스트레스를 거의 주지 않는 실험이다. C는 단시간의 경미한 통증 또는 스트레스를 가하는 실험이다.
D는 중등도 이상의 고통이나 억압을 동반하는 실험이다. 예를 들면 8시간 이상 음수 및 사료의 제한이 있거나 꼬리, 발가락 등 조직을 떼거나 마취 후 실시되는 외과적 처치가 필요한 실험이다. 마지막으로 E는 극심한 고통이 유발되는 실험이다. 고통을 유발하는 약물을 투여하는 실험, 감염실험, 체중 또는 체온의 변화, 물리적인 스트레스 유발 등이 해당한다.
국내에서는 국공립 기관, 대학, 의료기관, 일반기업체에서 동물실험을 시행하고 있다. 2021년 동물실험 실태조사 현황 자료에 따르면 488만 여 명(이 기사에선 동물을 셀 때 쓰는 '마리'가 아닌 하나의 생명을 뜻하는 '명(命)'을 단위로 씁니다. - 기자 말)이 동물실험에 사용되었다. 그중 45% 정도가 고통등급 E에 해당한다.
NAVS에 따르면 동물실험을 거쳐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임상 실험에서 진행되는 약물의 90%가 실패한다. 반면 10%의 성공률을 결코 낮지 않은 수치로 보는 이들도 존재할 테다. 이들은 인간에게 이롭기만 하다면 비인간동물을 실험에 이용해도 되는 권리가 인간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일 것이다.
아마도 대다수 사회 구성원은 이에 동의할 것이다. 적극적으로 동의하지 않더라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씁쓸하고 찝찝한 마음으로 말이다.
실험동물을 위해 할 수 있는 실천은?
고통을 등급화하다니. 사실 동물권 활동가로서 매우 참담한 심정이다. 비인간동물의 고통을 인간이 측정한다는 것 자체에서 비인간동물과 인간동물 간 위계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인간동물을 위한 비인간동물 실험은 불가피한 일인가. 동물실험 문제로 인해 최근에는 동물실험을 대체하는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 인공피부, 오가노이드(줄기세포를 사람의 장기와 유사한 구조로 배양하거나 재조합해 만든다), 장기칩 등을 활용한 대체실험법이 개발되고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대체실험이 상용화되고 있진 않다.
동물실험을 완벽히 대체할 수 없는 이 현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동물실험을 통해 만들어진 기술과 상품을 보이콧하는 것이다. 적어도 화장품, 샴푸, 콘돔 등 일상에서 사용하는 제품은 바꿀 수 있지 않은가. 크루얼티 프리 혹은 비건이라는 인증을 받은 상품을 구매하는 것이다.
만약 실험대상이 인간이라면?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휩쓸었다. 전 세계 코로나 사망자는 약 686만 명(2023년 5월 1일 기준), 국내 코로나 사망자는 3만 5천 명이다. 백신이 아니었다면 더 많은 이들이 코로나로 사망했을지도 모르겠다.
반면 분명한 사실은 백신을 만드는 데에도 수많은 실험동물이 이용되었다는 점이다. 급속도로 확산되는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수많은 비인간동물이 희생된 것이다. 만약 사람이 실험대상이었다면 어땠을까. 특정 인종 혹은 성별 혹은 민족을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이었다면 백신 개발이 진행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수많은 이들이 윤리적인 문제를 지적했을 것이다.
오늘날 생체실험은 사라졌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과학자 요제프 멩겔레(Josef Mengele)가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서 비난이 일었다. 일본군 731부대는 1930년~1940년대 중국인과 한국인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자행하기도 했다.
이후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의 가이드라인을 설정한 뉘른베르크 강령이 제정되었다. 이 강령에는 연구가 이전의 동물실험 결과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의무화했다. 즉 모든 임상실험 이전에 동물실험이 실시되어야만 한다.
피험자의 동의 없이 시행되는 실험은 사라졌다. 하지만 동물실험은 합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전혀 거리낌 없이 시행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동물 착취는 지탄받지 않고도 지속되고 있다.
이는 엄연히 종차별주의에 입각한 사고다. 종차별주의는 인간이 자신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다른 동물 종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일을 뜻한다. 이는 과도한 의인화가 아니다. 동물실험 과정에서 고통이 수반된다는 점과 동물의 이익을 제한하고 억압된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기 때문이다.
동물실험과 동물 생명의 존엄성은 양립할 수 있는가
아내가 백신 접종을 할 때였다. 보호자 동행이 필요해서 병원에 대기하던 적이 있다. 엘리베이터를 잘못 탔기 때문인지 지하층에 내렸다가 그냥 스칠 수 없었던 단어가 보였다. 정확한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 실험동물을 관리하는 실이 있었다.
한 층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대기하고 백신 접종을 하고 있었고 지하층에서는 동물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의 백신 접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동거묘 '헬씨'가 창밖을 바라보고 쉬고 있었다. 헬씨와 실험동물은 무엇이 다르기에 다른 일상을 보내고 있는 건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동물실험은 인류의 복지 증진과 동물 생명의 존엄성을 고려하여 실시하여야 한다.'
동물보호법 제23조에 동물실험의 원칙이 명시되어 있다. 이처럼 모순적인 법조항을 누가 만들었을까? 국내 동물실험에 이용되는 동물 488만 명 중 약 80%에 해당하는 380만 명이 고통 D, E 등급에 해당한다. 과연 동물실험과 동물 생명의 존엄성이 양립할 수 있는 문제인가.
인류의 수명과 건강을 향한 욕심을 '복지 증진'이라는 세련된 가면으로 가려놓은 것만 같다. 우리가 얼마나 종차별주의라는 뿌리 깊은 세계관에 물들어 있는지 깨닫게 된다.
동물을 인간으로 바꿔 법조문을 다시 읽어보자. '인간실험은 인류의 복지 증진과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고려하여 실시하여야 한다.' 이 문장에도 동의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