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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 Nov 09. 2023

삼십 대에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려는 당신께

삼십대 중반 복싱을 시작했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다. 삼십 대 중반인 지금 이십 대와는 몸 상태를 경험하고 있다. 강도 높은 운동 후의 회복 속도가 더디다. 체육관 고등학생들의 회복 속도와 스파링 체력을 보면서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몸소 증명하는 이들을 만나게 된다.


조지포먼은 45세에 복싱 챔피언이 되었다. 국내 김태승 복서는 마흔이 넘어 챔피언이 되었다. 체육관 관장님인 김두협 복서(더파이팅복싱짐)도 삼십 대 후반에 슈퍼웰터급 한국 챔피언이 되었고 마흔이 넘어서도 현역 프로복서로 활동했다. 지금도 체육관 혈기왕성한 프로선수와 회원들의 스파링 상대가 되어주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최근 창원(확인 유튜브)에는 60세가 넘어 프로 테스트를 받은 OOO 씨가 있다. 더 놀라운 건 프로테스트를 합격한 90세 복서도 있다. 인천에 OOO 씨가 주인공이다. 글자로만 보면 믿기지 않지만, 영상으로 움직임을 보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건가 다시 곱씹어보게 된다. 절로 존경의 박수가 우러나온다.


이들에게 깊은 존경심이 우러나오는 이유는 시합이라는 일회성 이벤트에 나서는 용기 때문만이 아니다. 링에 오르기 전에 수만 번의 주먹을 허공과 샌드백에 뻗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했겠는가.


나는 삼십 대 중반이 되어 복싱을 제대로 시작했다. 복싱장에 가면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이 절반 정도 된다. 그 나머지 성인 중 얼추 절반 정도는 이십대다. 스스로 나이가 들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늦은 때라는 건 없다지만 움츠러들 수밖에 없고 나 같은 초보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늦은 때라는 건 없다지만 저마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때가 있다. 스스로 뒤늦게 시작했다고 느끼는 복서들이 조심해야 하는 건 무엇일까?


스파링을 하지 않고 복싱 수련을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이 글에서는 스파링을 하는 복싱을 전제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본래 복싱이란 링 위에서 상대와 싸우는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뒤늦게 복싱을 시작한 이가 잊어야 할 것은 나이다.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나라에는 유교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장유유서. 나이 든 사람을 공경하고 우대하는 문화가 강하게 남아 있다. 하지만 링 위에서 나이가 무슨 소용인가.


언젠가 복싱을 한다고 하니, 어린 친구들한테 맞으면 ‘현타’가 오지 않느냐고 물었던 이가 있다. 뭐 맞기만 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때리기만 하는 것도 아니니 현타가 올 만도 하다.



현재 다니고 있는 복싱장에 등록하고 2주 정도 되었을 때부터 스파링을 시작했다. 대부분 나보다 어린 사람들이었다. 개중에는 고등학생도 있었다.


‘고등학생한테 맞는다'라는 생각이 앞서면 절대 스파링 할 수 없다. 어떤 스포츠든 마찬가지겠지만 나이를 잊어야 한다. 유명 가수라 하더라도 그림 그리는 일은 새로 배워야 하며, 평생을 마라톤 선수로 살아왔더라도 자동차 운전은 새로 배워야 한다.


누구나 처음이 있는 법. 그 처음이 좀 늦었을 뿐이다. 배우면 된다. 나이키 브랜드 슬로건처럼 그저 하면 된다.


나이가 들면 어느 분야든 경험이 쌓이고 나름의 전문가가 된다. 나이는 곧 체면이다. 체면을 따지면 복싱하기가 쉽지 않다. 사회적 체면을 생각하면 열 살을 훌쩍 넘게 차이나는 수련생과 스파링을 할 수 없다.


그런데 말이 쉽지. 고등학생한테 맞는다는 사실을 매 순간 잊어가며 스파링 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링 아래에서만 하더라도, ‘고등학생한테 맞고 다운되면 어떡하지’ 혹은 ‘내가 뻗는 주먹은 허공을 가르고 상대 주먹은 내 얼굴에 얹히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다.


어느 정도의 자존심 그리고 자신감은 지니고 링에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나이를 들고서 링 위에 오른다면, 스파링 후에는 마음의 상처와 구겨진 체면이 링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강점은 살리고 단점은 보완하려는 자세로 링 위에 오른다면 복싱 자체에만 몰입할 수 있다. 스파링에 몰입하다 보면 어느새 신기하게도 나이는 잊힌다. 링 밖의 시선도 잊히게 된다. 스파링에 집중할 때 나타나는 신비한 현상이다.


상대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상대의 복싱 스킬과 약점에 집중해야지, 상대의 나이나 사회적 지위에 집중해서는 안된다.


복싱을 수련해 본 자는 알 테다. 얼마나 숨이 차고 긴장되는지 말이다. 복싱은 별개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레슬링, 주짓수, 펀치와 킥, 엘보우, 니킥 등을 상황과 상대에 맞게 사용하는 이종격투기와는 달리 펀치만으로 승부를 내는 종목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펀치 기술이 있지만, 크게 잽, 스트레이트, 훅, 어퍼컷 네 개의 공격으로 구성된다. 대장간의 대장장이가 칼을 갈듯, 복서는 단순한 기본기를 수 만 번 연습한다. 그래서 고등학생이든 초등학생이든 나보다 좋은 기술을 가진 강한 상대를 만나면 존경이 우러나온다.


한편 복싱장에 등록한 지 9개월 정도 되었는데 종종 사오십대 회원 분들을 만난다. 어느 정도 안면이 트이고 인사를 나누기 시작하면 '형님'이라고 부른다. 보통 사회에서는 형님이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복시장에서는 자연스럽게 입에 형님이 붙는다. 아마도 사오십대 형님들을 부를 호칭이 그게 딱 적당하기 때문 아닐까.


나는 형님들이 복싱하는 모습을 볼 때면 속으로 진심 어린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삼십 대인 나로서는 이삼십 대가 확연히 차이가 나는데, 사오십 대의 몸으로 복싱을 한다는 건 가늠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자체만으로도 박수받을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복싱이 매력적인 운동인 이유는 상대를 이기기 위해 매일 나 자신을 이겨야 한다는 점 때문이다. 세상은 넓고 강자는 많다. 세계 챔피언이 아닌 이상,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한 명 이상은 무조건 있다.


복싱의 목표가 세계 챔피언인 이들도 있겠지만, 매일 나 자신을 딛고 성장한다는 점에서 정말 끝이 없는 운동이라고 느껴진다. 나보다 어린 친구들을 보면서, 형님을 보면서 그리고 대회에 나서는 여성 회원을 보면서 존경의 마음이 우러나오는 이유다.


어쩌면 복싱은 성실함이라는 최고의 인생 기술을 연마하기에 가장 적합한 종목인지도 모르겠다. 액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멋진 카운터를 뻗는 사람들로 가득한 건 아니다. 하지만 어제의 자신을 이겨내려고 오늘 수많은 펀치를 뻗는 이들이 복싱장에는 가득하다.


그래서 내게 복싱장은 아름다운 장소다. 하루에 남은 온 에너지를 쏟아붓지만 되려 에너지를 얻고 돌아오기 때문이다. 마치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을 마주할 때처럼 말이다. 복싱뿐만이겠는가. 무엇이든 어느 한 분야에 깊이 빠져들면 감탄이 나오면서 겸손해진다.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기에 늦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테다. 육십 대, 구십 대 복서가 뻗는 주먹과 몸놀림을 보라. ‘나이 먹고 무슨 주먹질이냐’라는 사회적 편견을 보기 좋게 깨부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명언을 몸으로 표현한 한 편의 예술 작품과도 같다. 이 살아있는 예술을 지켜보다 보면 무엇이든 시작하고 싶은 용기와 의지가 샘솟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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