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과 나는 서로에게 노관심이었다.

by Rumierumie

파리가 첫사랑이었다면, 런던은 비즈니스적인 관계랄까?


도시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선택. 마치 처음 만난 상대에게 사랑에 빠져버리는 순간 같다.



파리는 나의 첫사랑이다. 왜냐고 물어봐도 도저히 논리 있게 설명할 수가 없다. 파리에 대한 기대와 동경은 해외여행 한 번 안 가본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 설렘은 너무 강렬해서 도시에 직접 가서 살면서 사귀어보게 만들었다. 대학교 막 학기를 남겨두고, 8개월 동안 파리에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 파리에 산다고 나 자신이 파리지앵으로 변신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우당탕탕 거리면서 겪었던 소소한 첫 해외 생활 경험은 풋풋했다.


그런데, 두 번째 워킹 홀리데이를 위해 선택한 도시 런던은 도대체 설레질 않았다.





왜 런던이었을까

설레지도 않는 나라, 도시에 굳이 왜 워킹 홀리데이를 갔을까?




런던엔 사랑, 디자인,
그리고 가능성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 그대는 어느 별에서 왔니

2013년 12월,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런던 남친이 영국으로 돌아갔다.


런던 남친은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와, 나의 나라, 나의 문화에 대해 더 잘 알고 싶다고 용기 있게 한국행을 선택했었다. 2년 동안 영어교사와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남친은 한글을 깨치고 한국 음식을 척척 요리하더니, 어느새 한국 친구들도 꽤 만들었다.


새로운 환경과 문화에 눈뜨는 남친에게 딱 한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전공인 디자인 쪽의 경력을 한국에서 이어나가고 싶었는데, 좀처럼 취업 비자를 지원해주는 회사를 만날 수가 없었다. 결국 본격적으로 디자이너 경력을 더 쌓으려면 런던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어려운 결정이었다. 이미 2010년 서울에서 처음 만나, 파리, 런던, 서울을 오가며 롱디 커플로 지냈던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는 시간의 외로움과 허전함을 이미 알고 있었다. 다시 롱디 커플로 지내야 한다고 생각만으로도 피곤했다. 떨어지고 싶지 않다면, 이번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나라에 가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제 전공이요? 디자인인데요...

병아리 같은 사회 초년생이었던 나의 첫 직업은 게임 마케터였다. 복수전공과 광고 동아리에서 주워 담은 마케팅과 기획 지식으로 삐약거리는 수준이었다.


하루는 신규 게임 마케팅 기획 회의에서 이사님이 ROI를 계산해오라고 했는데, ROI가 어떤 약자냐고 되물어서 회의실에 얼음장을 끼얹은 적이 있었다. 인내심을 거의 잃을 뻔 한 이사님이 전공을 묻길래, 디자인이라고 대답했다. 왠지 생각보다 덜 혼나고, 마케팅 전공 서적을 몇 권 추천받았다.


마케팅도 재미있었지만, 사실, 나는 마케터가 된 후에도 디자인과 바람을 피웠었다. 디자인씽킹, 서비스 디자인, 새로운 디자인 방법론과 관련된 강의가 있으면 주말도 퇴근 후 시간도 반납하고 디자인의 세계로 돌아갔다.


서비스 디자인 방법론에 푹 빠져있을 때, 유럽 회사들의 사례를 자주 들었다. Engine, Livework, Fjord, Design Council, 이론적인 이야기보다 실제 프로젝트로 진행된 사례들을 보면서, 언젠가 이런 일을 해보고 싶다고 꿈을 품었다.


런던 남친의 나라에 가서 산다면, 디자인 일을 해서 먹고살고 싶었다.




마음을 부추기는 그놈, 가능성

사랑에 대한 집착과, 꿈에 대한 야망도 있었지만, 또다시 외국에 나가서 혼자 살기로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20대 초반에 프랑스로 떠날 때는, 젊으니까 실패해도 괜찮다는 무모함과 용기가 있었다. 실패해도 잃을 것이 없었다. 하지만 20대 중반에 들어서는 나이에 한국의 직장도 생활도 다 내려놓고 새로 해외생활을 하자니 생각만으로도 피곤했다.


만약 영국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가, 사랑도 경력도 다 잃고 한국으로 돌아오면 뭐가 남을까 걱정도 컸다. 프랑스에서 돌아와 한국에 다시 적응하기까지 마음고생했던 것을 생각하면, 영국에 갔다가 또 돌아와서 직장 찾을 길이 깜깜할 것 같았다.


이성은 쉽게 두 번째 워킹 홀리데이를 허락하지 않았는데, 감성이 흔들렸다.

사랑도, 꿈도, 새로운 해외 생활도 잘 해낼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는 초긍정적인 감성의 목소리. 자꾸 팔랑귀가 팔락거렸다.

영국은 영어로 말하는 나라니까, 프랑스보다 의사소통은 쉬울 가능성이 있다.

회사 생활을 2년은 해봤으니까, 경력을 살려 직장을 찾을 가능성도 있다.

동경하는 디자인 회사들이 유럽에 있으니까, 입사 기회가 있을 수도 있다.

남친이 있으니까, 혼자보다는 덜 외로울 것이다.


프랑스에서 생존하면서 얻은 개똥철학 중 하나.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포기하면 나중에 후회한다. 후회하더라도, 직접 해보고 경험하는 것을 감사히 여기자.


결국, 손톱만큼의 가능성도 지나칠 수 없었던 나는, 두 번째 워킹홀리데이를 영국으로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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