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의 두려움을 꺼냈다.

by Rumierumie

나는 일기를 꾸준히 쓰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파리에 살 때는 일기를 많이 썼다. 처음으로 혼자 외국에 나와서 살면서 답답하고 화나는 일이 생길 때 털어놓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말로 술술 뱉지 못한 말들이 속에서 곪을 것 같았다. 곪아서 터져버릴까 봐 일기장에 한글로 털어놓았다.


언어가 막히면 그만큼 경험도 막혀버린다는 것을 프랑스에서 배웠기 때문인지, 영국에 갈 때는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도록 언어 능력을 키우기로 했다.



일단 말이라도 할 줄 알아야지

비자 준비하는 기간에, 언어라도 익숙하게 만들어 놓자는 생각에 강남에 있는 영어학원에 회화반도 등록하고, meet up을 매주 찾아서 작은 모임들에 참여했다. Meet up 커뮤니티는 한국사람들보다 외국 사람들에게 더 활성화된 것 같았다.


서울에 언어 교환 meet up은 정말 많았다. 하지만 예전에 파리에서 언어 교환 모임을 몇 번 나가 보니까, 대화할 수 있는 주제나 깊이가 한정되어 있어서 대부분 실망했었기 때문에 굳이 다시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에, 내 관심사와 연결된 meet up에 나가기로 했다. 디자인, 스타트업, 테크놀로지 관련 대화를 해보고 싶었다. 영국에서 일하고 싶은 분야와 관련이 있는 주제를 검색해보니, 꽤 다양한 meet up을 찾을 수 있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서 내 소개도 하고, 그 사람들의 개성 있는 배경과 관심사에 대한 경험을 듣다 보니까 어느새 영어로 대화할 수 있는 주제도 늘어나고, 영어와 비언어적인 표현을 섞어가며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도 자연스러워졌다.



언어보다 늘어난 배짱

Meet up에 나가면서 또 하나 얻은 것은 배짱이다. 자기 나라를 떠나,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외국 사람들에게 “왜 한국에 왔냐”라는 질문을 자주 했다. 궁금했다, 도대체 왜 한국이었을까? 물었을 때 돌아오는 대답이 천차만별이었다.

중국과 일본에서 일해보고, 한국도 빼놓을 수 없어서 와봤다는 사람

대학교에서 자매결연을 맺어 교환학생으로 왔다가 일하게 됐다는 사람

K팝 스타를 좋아해서 한국에 살아보고 싶었다는 사람

사람마다 다른 이유로 이 나라에 왔다는 것도 재미있었고, 가끔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아서 고생했다는 투정도 듣기 좋았다. 국적을 불문하고, 모두들 인생이 계획처럼 착착 굴러가는 것은 아니라는 게 새삼 반가웠다. 영국으로 떠나기 전부터 계획대로 안 될까 봐 전전긍긍하는 내 모습을 조금은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첫 번째 워킹홀리데이를 경험했을 때, 언어만큼 답답한 것이 '경력'이었다. 당장 빵을 사고, 집세를 내야 할 돈을 벌어야 하는데, 대학교도 졸업 안 한 학생의 경험과 경력은 직업 선택의 폭을 넓히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만난 워홀러들 중에서, 전문가의 포스를 풍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조금이라도 사회 경험을 하고 온 사람들. 자신의 전공을 살려서 나라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는 워홀러들이 있었다. 자기의 경력과 경험을 바탕으로 프랑스에서도 자기에게 맞는 자리를 찾아 취업에 성공하는 모습이 그렇게 부러웠다.


런던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할 때는, 나도 그렇게 전문가 포스를 풍겨보고 싶었다.



경력을 경험으로 보기

나름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게임 마케팅 경력을 2년 동안 쌓았다. 그런데 이 경력이라는 것이, 버리기도 아깝고, 이어가자니 힘들고, 꼭 계륵 같았다.


경력을 살려서 게임 마케터로 영국 회사에 지원을 하자니, 선택의 폭이 좁아지는 것 같았다. 링크드인이나 구글링으로 게임 마케터 공고를 검색했는데, 2년 차 경력은 너무 짧아서 포지션이 맞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비자 발급일은 다가오고, 일자리 찾기는 진전이 없었다.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을 보고 런던 남친이 한 마디 했다.


“You have loads of transferable skills!”



Transferable skills?

처음에 이 단어를 들었을 때는, 트랜스포머같이 변신하는 재주를 말하는 건가 싶었다. 직역하면, ‘이전 가능한 스킬’ 이란 건데... 이게 뭘까?


전문적인 기술 지식은 아니지만, 일을 할 때는 여러 곁가지 기술들도 필요하다. 문서 작성, 시간 관리, 워크숍 퍼실리테이션, 스케치, 등등. 한 분야에 깊이 몸 담아서 쌓은 전문 지식은 아니지만, 잡식성으로 익혀온 기술들이 일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말을 런던 남친은 내게 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정해진 직업과 역할에 나를 끼워 맞출 생각만 했는데, 다양한 경험 속에서 배운 기술들을 다른 직업에서도 사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못했었다.


다시 이력서를 검토했다. 직업명에 치우치지 않고 딱 세 가지에 집중해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다시 생각했다.

이미 가지고 있는 transferable skill은 무엇인지

어떤 전문 지식과 기술들을 개발하고 싶은지

어떤 경험이 새로운 기술 개발에 도움이 될지



이력서를 보는 각도가 달라지니까, 회사를 고르는 눈도 변했다.

경험의 유무에 집중하면서 이력서를 읽었더니, 미처 강점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보였다. 심지어, 한국말을 할 수 있고, 한국에서 일해본 것조차 강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만약 어떤 영국 회사가 한국 시장에 진출하려고 한다면, 한국말을 잘하고 한국 시장을 이해하고 있고, 영어로 소통이 가능한 사람을 필요로 할 거다. 그 회사에서 내 이력서를 본다면, 한국과 관련된 경험들이 충분히 매력적이지 않을까?


강점으로 어필할 수 있는 부분을 계속 찾아내면서, 어떤 회사를 들어가야 할지 판단 기준도 점점 달라졌다. 이력서에서 빠진 경험들을 채워줄 수 있는 회사와 직무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당장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회사에 가서, 나를 업그레이드시켜야겠다. 이력서에 새로운 경험과 강점을 채워서 또 다른 회사로 이동할 수 있도록, 뜀틀의 발돋움판 같은 회사를 찾기로 했다.



발돋움판 같은 회사, stepping stone

관점을 바꿔서 새롭게 작성한 이력서와 회사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지원할 곳을 검색했다. 링크드인, Reed, Indeed, 세 군데를 주로 이용했다. 검색 결과를 훑으면서 중점을 둔 기준은:

한국 시장 마케팅 경험이 필요한 곳

한국말 할 줄 아는 사람을 원하는 곳

기본적인 마케팅 스킬과 경력을 인정해 주는 곳

영국 시장 외에, 글로벌 시장을 대상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지

나중에 워킹 비자를 스폰서 지원이 가능한 수준의 회사 규모, 구조가 갖춰져 있는지


직업명, 회사 인지도, 연봉 등등 많은 것들을 걱정하면서 지원 공고를 확인하던 때보다 훨씬 집중할 수 있었다. 모든 기준을 만족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가능성이 보이는 회사를 추려냈다. 당장 지원할 수 있는 회사들의 공고만 가지고 각 회사에 맞게 자기소개서 (cover letter)와 CV를 수정했다.


각 회사마다 지원서를 받는 방법이 달라서, 이메일이나 회사 홈페이지의 채용 페이지에 CV와 자기소개서를 첨부했다.



런던 직장러의 탄생

관점을 바꿔서 회사를 지원한 덕분인지, 이메일을 보낸 지 일주일도 안되어서 두 군데나 연락을 받았다.


첫 번째 회사는 게임 마케팅 경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곳이었고, 두 번째 회사는 이전 경력은 인정해 주지 않지만 지금 내가 가지지 못한 경험들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곳이었다. 두 차례에 거쳐 면접을 보고, 나는 두 번째 회사를 선택했다.


두 번째 회사는 연봉도 상대적으로 적고, 직급도 trainee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지만, 영국에서 직장러로 거듭나기에 완벽한 디딤돌이었다. 다시 선택하래도 같은 결정을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입사한 후에 영국 회사 문화와 마케팅, 데이터 분석 등등 정말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두 번째 워킹홀리데이 시작한 지 3개월, 런던에서 APAC market analyst 직장러가 되었다.

이전 03화설렘보다 두려움이 많은 두 번째 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