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이라고 봐주지 않는다.

by Rumierumie

비즈니스 영어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trainee 시절.

회의에서 내 의견을 명확하게 전달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신입사원이고, 외국인이니까 얼렁뚱땅 넘어가 주지 않을까 싶어서 대충 말끝을 흐리면서 눈치를 봤다. 쪽팔려서 서둘러 다른 사람에게 발언권을 넘기려고 했는데, 미팅을 진행하던 팀원들이 메모지에 그림을 그려가면서까지 내가 말한 내용을 파악하려고 했다.


개인의 언어 능력이 부족한 것을 탓하는 사람은 그 방에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림을 그려서라도 알아내고 싶은 것은 APAC market analyst의 관점과 의견이었다. 대충 말하는 것을 잘못 알아들었다가, 나중에 책임져야 할 일이 생기지 않도록 철저하게 이해하려는 진지함을 보고 ‘외국인이니까 봐주겠지’ 생각했던 마음을 싹 고쳤다.






봐주기 없기

런던에서 일하면,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외국인이라서 잘 모르니까 봐주자, 이런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모국어가 영어가 아니라고 대충 이해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절대 없다. 직장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언어 능력, 문화, 계급장 다 떼고, 충실하게 프로의 자세로 링에 서야 한다.


경력직으로 커리어 전환을 해서 2년째 다니고 있는 지금의 회사에서도 매일 진지한 순간들이 찾아온다. 부담스러울 만큼 프로페셔널한 자세와 책임감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과 있다 보니까 회사에서 ‘외국인’으로 특별 대우받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상대방이 어디서 온 누구이든 간에, 동등한 입장으로 링에 서서 프로의 지식으로 치고박는 권투선수처럼 일하러 다닌다.



계급장 떼고 덤비기

회사에서 우리는 얼마나 동등한 목소리를 내면서 일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 일할 때, 아이디어 회의를 한 적이 있었다. 이사님이 “자유롭게” 의견을 내라고 했는데 어쩐지 회의가 끝난 후에 결정된 사안은 모두 이사님이 낸 아이디어뿐이었다. 회의 분위기가 좋았고, 이사님도 팀원들의 의견을 들을 때 오픈 마인드를 유지했는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상하관계를 뛰어넘지 못했다. 그 후로도 비슷한 회의가 있었지만, 어쩐지 매번 이사님의 아이디어만 남았다. 그 후로 아이디어 회의에서 점점 말 수가 줄었다.


런던에서 trainee, junior, mid-weight 순서대로 직급을 올려가며 일하니까, 아이디어 회의에 참여할 기회가 잦아졌다. 한국에서 일하던 때의 기억 때문일까? 나는 자체 음소거 모드가 됐다. 회의실에 앉아있는 사람 중에서 가장 직급이 높은 사람의 의견이 답이겠거니... 하고 가만히 앉아있는데, 이게 웬걸.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인턴, 주니어, 시니어, 상관없이 아이디어가 화산처럼 폭발한다.


시니어의 아이디어를 듣던 주니어가, 흥미롭지만 이러저러한 점이 지루한 것 같으니, 다르게 접근하고 싶다고 또박또박 말한다. 시니어가 발끈할 줄 알았는데, 회의실 분위기는 더 활기차게 변한다. 회의실에서 가장 직급이 높았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도 즐거워 보인다. 말은 거의 하지 않지만 너나 할 것 없이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것을 절대 막지 않는다.


즐거운 토론 시간에 제일 이상해 보이는 사람은, 음소거 상태의 나뿐이었다. 의견이 없는 사람은 이 회의실에 필요 없어 보였다. 벙 쪄있는 나를 보던 디렉터가 배려해주어서 조금씩 발언권을 가지고 작게나마 내 생각을 전했다. 긴장해서 횡설수설하는데도 허투루 듣는 사람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직급을 다 떼고 덤빈 회의가 끝날 무렵엔, 우리가 생각했던 것들이 반영된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왔다.




경험으로 편견을 지운다

‘그냥’은 없다. 다른 사람과 의견이 다른 경우에는 왜 다른지, 어떻게 하고 싶은지 설명해야 하는데, 경험만큼 신빙성 있는 설명이 또 있을까. 잘 생각해보면, 회의실에서 모두 계급장 떼고 동등하게 대화할 수 있는 이유도 각자의 의견을 낼 때, 개인의 경험을 토대로 의견을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영국 회사의 경험 사랑은 첫 직장 면접 때부터 알았다. Camden 오피스에 가서 대면 면접을 했는데, 질문받은 것이 모두 지원한 직무와 관련된 경험에 대한 것이었다.


한국에서 취업 준비를 할 때, 면접에서 받았던 질문은 참 다양했다. 왜 워홀을 다녀왔는지, 왜 전공과 다른 직무를 선택했는지, 미래의 포부는 뭔지, 등등 이력서에 나오지 않은 것들까지 꼼꼼하게 물어봤다. 한 사람을 파악하는 데에 있어서, 여러 관점의 질문을 통해 알아가는 것도 분명 좋은 방법이겠지만, 가끔 회사에서 일하는데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알려야 하는 건지 부담스럽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딱, 이력서와 자기소개서에 적힌 내용만으로 질문을 했었다.

예를 들어서, 디지털 마케팅 에이전시 면접을 볼 때는 마케팅 관련 질문만 받았다. 글로벌 마케팅 경험이 있다고 적혀있으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해달라던지, 그 프로젝트에서 나의 역할은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 말해달라는 식이었다. 한 시간 동안 면접을 하고, 해당 직무에 적합한 수준의 엑셀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는 과제 면접을 따로 보기도 했다.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의 면접도 다르지 않았다. 마케팅에서 UX로 커리어 전환을 하는 것에 대해 집요하게 물어볼 거라고 예상하고 미리 대답을 준비했었는데, 면접에서 단 한 명도 물어보지 않았다. 오히려 어릴 때부터 다양한 경험을 한 것 같아서 참 보기 좋다고 사람 좋게 웃으며 칭찬해 주길래 쑥스러워하며 면접을 봤었다.


런던에서 일하면서 사람들이 얼마나 경험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았다. 어느새 직장 동료들과 일하면서 ‘경험’에 대해 묻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경험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추측을 낳지도 않는다. 가장 사실적인 증거를 가지고, 편견 없이 사람을 채용하고, 같이 일하고, 또 새로운 경험을 같이 쌓아가는 게 좋다.




웃을 수 없는 순간들

계급장 떼고 붙는 링에서 실력만 있으면 동등할 것 같지만, 아웃사이더 같은 상황이 심심치 않게 찾아온다. 마치 홈그라운드가 아닌 곳에서 실력 발휘를 해야 하는 압박감이 든달까.


특히, 아무리 노력해도 항상 숙제로 남는 것이 소프트 스킬(soft skill)이다. 회사 동료들부터 시작해서 클라이언트까지, 상대방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스킬을 소프트 스킬이라고 하는데, 방법은 다양하다.


공통된 관심사 찾아보기, 영국에서는 날씨가 워낙 오락가락해서 날씨 이야기가 잘 먹힌다.

관찰과 칭찬하기, 굳이 외모가 아니더라도 뭔가 칭찬할 거리가 있으면 말을 꺼낸다.

밑도 끝도 없이 물어보기, "아유 오케이?" 그냥 물어봐도 대부분 쉽게 대답해 주는 안부 인사다.


대수롭지 않은 스킬 같지만, 작은 의사결정부터 승진까지, 소프트 스킬이 없으면 직장 생활은 마른 사막길을 혼자 쓸쓸하게 걸어가는 것만큼 외로워진다.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라 쉽게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못하는데, 영국에서 직장러로 살려니까 생존을 위해서라도 소프트 스킬을 연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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