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채용 공고들을 보다 보면, 말도 안 되게 높은 스펙을 요구하는 곳들이 있다. 인턴을 채용하는데, 관련 직무 경험을 2년 이상 한 사람을 찾고 있다는 공고를 본 적이 있다. 채용 담당자가 제대로 직무를 이해하고 쓴 게 맞는지 의심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을 뽑아서 인턴으로 쓰겠다는 건지...
콧대 높은 채용 공고를 낸 곳에 배 째라는 심정으로 지원한 적이 몇 번 있었다. 우습게도, 지원자 기준에 완벽히 들어맞지 않아도 서류 통과 및 면접을 볼 수 있었다. 몇 군데 면접을 보고 알았다. 업무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어야만 채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각 회사마다 일하는 방식이 다른데, 어떻게 회사가 원하는 경험을 모두 다 가지고 있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 영국에서 일한 회사들은 다행히도, 부족한 경험을 채워갈 수 있는 교육과 연습의 기회를 줄 것을 약속하면서 나를 채용했다. 경험이 부족한 부분을 솔직하게 알아보고, 필요한 지원을 해주는 부분이 마음에 쏙 들었다.
모른다고 혼나는 일은 없다
부끄럽지만, 나는 비즈니스 영어라는 것을 정식으로 배우거나 훈련한 적이 없었다. 강남에서 직장인 영어반을 다닐 때도 회화반을 등록해서 의사소통이 막히지 않는 연습만 했지, 비즈니스 영어를 따로 배워볼 생각을 못했다.
런던에서 첫 직장에 입사한 첫날, 결국 영어 커뮤니케이션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라인 매니저가 팀원들에게 소개하는 자기소개 이메일을 작성해서 보내달라고 부탁했는데, 평소에 친구들에게 보내는 문자메시지처럼 줄임말을 잔뜩 넣어서 소개글을 썼다. ‘보내기’를 누르려는 찰나에, 매니저가 잘 되어가냐고 묻길래 자랑스럽게 이메일을 보여줬다. 난감한 표정으로 웃던 라인 매니저는 정중한 이메일 커뮤니케이션 (formal English) 트레이닝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영어 커뮤니케이션 외에도 업무 관련 인수인계가 아주 체계적으로 이뤄졌었다. 매니저는 업무 내용을 설명해주고, 비슷한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는지 물어봤다. 모른다고 하면 혼날까 봐 주저했다. 매니저는 금세 눈치를 채고, 모르는 부분을 알아보고 같이 계발 계획 (주로 development plan이라고 한다.)을 짜려고 하는 것이라며 나를 안심시켜줬다. Trainee에게 가장 중요한 업무는 배우는 것이라고 응원을 받으면서 업무에 익숙해졌다.
Development plan은 트레이닝 기간이 지난 후에도 매 분기 또는 해마다 계속되었다. 한 단계씩 직급이 높아지면서 매니저도 바뀌었는데, 새로운 매니저와 만나서 이전의 development plan을 같이 훑으면서 앞으로는 어떤 부분을 더 발전시키고 싶은지, action plan으로 정리해서 같이 실행 계획을 짜는 식이었다. 반드시 업무와 관련된 항목만 있는 건 아니다. 한 번은 소프트 스킬을 기르고 싶다고 했더니, 다음 달 소셜 (회식 같은 친목도모 이벤트)을 기획하고 사람들을 초대하는 action plan을 추천해줬다. 개인적인 취미나, 동기부여가 되는 소모임을 리드해보는 플랜도 있었는데 모두 도움이 됐다. 매일 똑같은 회사 생활에 활력소 같은 존재랄까.
영국에서 일하는 5년 동안 몰라서 혼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모르는 것을 솔직하게 말하고 배우려는 의지를 보이면 반드시 누군가가 도움을 준다.
경력직으로 입사해도 모르는 게 많다
커리어 전환으로 마케팅에서 디자인 분야로 직업군을 옮겼다. 경력 3-5년 차 mid-weight으로 입사한 지금의 회사는 첫 직장보다 규모가 훨씬 크다. 98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회사니까, 차려진 밥상에 앉아 반찬을 꼭꼭 씹어먹는 것처럼 꼼꼼하게 인수인계받을 거라고 기대했다.
첫 출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에게 내가 일할 팀에 대한 소개를 받았다. 마음 푹 놓고 있었던 인수인계가 갑자기 엄청난 숙제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알고 보니, 최근에 퇴사한 시니어 UX Architect가 일하던 팀의 크기가 갑자기 커지고, 새로운 사원을 투입하는 자리에 내가 배정받은 것이었다.
눈 앞이 하얘졌다. 200명에 가까운 팀 안에 UXA 한 명, 그런데 앞서 일하던 사람으로부터 업무 인계를 받을 수가 없다니… 새로운 직업군에 대한 걱정만으로도 충분히 긴장상태였는데, 디렉터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생글생글 웃으면서 몇 명의 이름을 전해주면서 물었다.
“이 사람들하고 커피 한잔씩 해보는 건 어때?”
강력한 커피 한 잔
하루라도 빨리 업무 파악하고 실무에 적응하라고 할 줄 알았더니, 커피를 마시라고 할 줄이야. 소개팅도 아니고, 처음 보는 사람한테 커피 한 잔 하자고 메일 보내는 게 첫 업무가 됐다.
메일을 보내는 것조차 어색했다.
안녕하세요. 저... 새로 팀에 배정받았는데,
저랑 커피 한 잔 하실래요?
디렉터가 제안한 거니까 쓰긴 쓴다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대답을 할까? 긴가민가 하면서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예상과 다르게, 메일을 보내는 사람마다 금세 회신을 했다.
만나고 싶은 시간과 카페 (회사 안팎으로 카페 선택지가 꽤 다양한 편이었다.) 위치까지 함께 정해서 보내주는 사람도 있었다.
커피 한 잔은 알고 보니, 끈끈하고 정겨운 인수인계나 다름없었다. 새로운 팀원을 환영하면서, 자기가 하는 일과 소속 팀에 대한 소개를 하고, 앞으로 어떤 일을 같이 하게 될지 가볍게 안내해주는 시간이었다.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 커피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직무에 대해 큰 틀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은 나도 가끔 커피 한 잔 하자는 메일을 받는다. 새로운 팀원 또는 옆 부서의 디자이너들이 내가 담당하는 프로젝트에 대해서 소개받고 싶을 때 커피 마시자고 제안하는 것인데, 입사 첫 달에 마셨던 커피 잔들이 생각나면서 혼자 몰래 웃기도 했다.
질문은 언제나 환영받는다
각 부서마다 몇 백 명 단위로 구성된 거대한 영국의 국영 방송국은, 덩치가 커도 너무 크다. 2년 후에 백 살이 되는 회사다 보니, 사람도 많고, 프로젝트도 많고, 배워야 할 것도 많다. 새로 팀원이 들어오면, 이 회사에 적응하는 데에 6개월 이상 걸리는 게 보통이니까 너무 조바심 내지 말라고 다들 응원한다.
하지만 명색이 경력직인데, 적응할 때까지 느긋하게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커피 미팅으로 알게 된 사람들에게 알아두면 좋은 프로젝트, 서비스 데이터 구조, 팀 구성 등등 미리 읽어둘 수 있는 것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추천받은 문서를 읽는 작업은, 배치도 없이 도서관을 통째로 머리에 구겨 넣는 것 같았다. 아무리 잘 작성한 문서라도, 그 당시의 배경 설명을 모두 문서화할 수는 없는 법. 결국 문서가 말해주지 않는 것들은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한다. 가장 골치 아픈 것 중 하나가 프로젝트 명을 줄여서 만든 줄임말(acronym)이었다.
앞서 trainee 시절에 모르는 것을 물어봐도 혼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지만, 새로운 회사는 방송국이라서 그런지, 다들 좀 도도하고 똑똑해 보였다. 프로젝트 이름의 줄임말 대신, 풀네임을 물어보면... 형편없는 질문을 했다고 바보 취급을 받는 건 아닐까? 쫄보답게 덜덜 떨면서 개발팀 회의 중에 질문을 던졌다.
회의실이 아주 잠깐 조용해졌다.
개발팀 리드가 상큼하게 웃더니 입을 열었다. “정말 좋은 질문이네요, 그런데 저도 몰라요!”
줄임말을 너무 많이 써서 다들 당연하게 프로젝트 명이 입에 붙어버렸다고 했다. 회의실에 있는 사람 중에 프로젝트 풀네임을 아는 사람이 없어서, 개발팀 채팅창에 누가 물어보고는 팀에 가장 오래 있던 사람 중 한 명으로부터 답을 찾았다. 오히려 질문해 줘서 고맙다고, 자기도 배웠다고 말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어휴, 겨우 한시름 놓았다.
모르는 것을 물어봤을 때 환영받는 법칙은 새로운 회사에서도 존재했다.
수줍은 러브콜
회사 생활과 유학 생활을 쭈욱 돌아보면, 영국에서 사람을 직접 만나고 알아가는 과정을 참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커피를 마시자고 제안하는 것은, 당신과 얼굴을 직접 맞대고 찬찬히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러브콜 같은 것이다. 인수인계도, 스카우팅도, 심지어 면접도 커피 한 잔으로 해결되기도 한다. 만약 영국에서 커피 마시자는 사람이 있다면,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한 잔 같이 기울이면서 이야기를 나눠보면 어떨까?
그런데 왜 하필 커피일까? 영국은 tea 문화로 유명하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