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에 다닐 때였다. 아빠는 몇 주동안 퇴근 후에 집에서 서류 작업을 하고 인터뷰 준비를 했다. 어려서 잘 몰랐지만, 아빠가 승진 심사 때문에 많이 긴장된다고 하길래 힘내라고 손편지를 써서 출근길에 건넸었다.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부적을 손에 쥔 것처럼, 아빠는 편지를 천천히 읽고는 나를 안아줬다.
편지가 효과가 있었나 보다. 아빠는 차장님이 됐다. 차장님이 된 첫 주말, 아빠는 외식을 선언했다. 소갈비를 다 먹지도 못할 만큼 시키고, 우리에게 사이다를 따라주면서 아빠는 활짝 웃었다. 후련하고 자신감 넘치는 얼굴, 아빠가 신나 하니까 막연하게 승진은 참 행복한거구나...하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서 어느새 나도 직장 생활 6년 차다. 이제는 아빠가 왜 그렇게 활짝 웃었는지 얼추 알 것 같다. 직급이 바뀌는 그 순간에, 나도 소갈비를 무한으로 쏘고 싶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영국에서 일하면서 승진하는 게 쉽지만은 않다. 원래 직급이 높아질수록 채용하는 수가 적어지니까, 문턱이 높아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 경우에는 마케팅에서 UX로 커리어 전환을 하다 보니 senior 직급으로 바로 채용되기는 힘들 것 같아서 지금 다니는 회사에 입사할 때 살짝 지원 기준을 낮췄다.
Trainee부터 한 단계씩 차례대로 올라가다가, 갑자기 뒷걸음질을 친 것 같은 느낌을 떨칠 수 없다.
Mid-weight 다음은 Senior
이전 직장을 퇴사할 때 마지막 직급이 mid-weight이었는데, 마침 senior로 승진할 기회가 있었다. 3년동안 다닌 회사여서 몇 번의 인터뷰와 성과 평가를 거치면 어렵지 않게 승진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퇴사하고 석사 과정을 선택했다. 1년 3개월의 석사기간을 마치고 취업할 때, 같은 직급으로 지원했다.
각 회사마다 직급에 대한 정의와 평가가 다르지만, 한국의 회사 직급으로 비교해보면 대리에서 과장, 또는 과장에서 차장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걸쳐있는 것 같다. 이전 직장에서 아쉽게 senior가 될 기회를 놓쳤기 때문인지 지금도 승진에 대한 갈증이 가시질 않는다. 하지만, 코로나19 이후에 지금 다니는 회사는 채용 및 승진을 잠정적으로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우물 밖의 개구리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승진이 하고 싶은데 회사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대신 이직하는 방법도 있다.
영국에서는 회사를 자주 옮기는 사람을 많이 만났다. 이직을 자주 하는 것은 흠이 아니다. 다니던 직장에서 더 발전할 수 없거나, 더 성장할 기회를 찾기 힘들 때, 자신의 위치에 대한 편안함 (comfort zone)을 박차고 다른 곳으로 이직해서 기회를 만들어내는 사람을 오히려 인정해주는 편이다.
첫 직장에 다닐 때, 다른 부서에서 입사 파티를 엄청 크게 한 적이 있었다. 보통 새로운 사람이 오면 작게 환영 선물과 카드를 준비하는데,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 입사하길래 부서 전체에 풍선이 걸리고 웰컴 드링크가 준비되는지 궁금했다. 회사에 오래 있었던 직장 동료에게 물어보니까, 이번에 들어오는 디렉터가 alumni 출신이라고 했다.
회사를 ‘졸업’하고 다른 회사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더 크게 성장해서, 다시 회사에 도움이 되고자 돌아오는 사람. 우물 안 개구리처럼 회사 속에서 배우고 경험한 사람보다, 외부의 경험과 새로운 지식을 가지고 돌아오는 사람을 영국 회사 사람들은 대환영했다.
첫 회사를 퇴사할 때, 나보고 언제든지 돌아오라고 인사해주던 직장동료들의 말이 빈말 같지가 않았다. 어쩌면 나도 언젠가 우물 밖의 개구리가 되어서 쑥쑥 성장하다가, 마음에 쏙 들었던 회사에 다시 돌아가는 건 아닐까?
캡틴 바르보사의 저주일까
캐리비안의 해적 영화 ‘블랙펄의 저주’를 보면, 캡틴이 저주받은 보물을 훔치려다가 저주에 걸리는 바람에 선원들이 모두 영원히 죽지 못하고 배의 일부가 되어서 살아간다. 저주받은 선원 중에 윌 터너의 아빠 빌 터너가 등장하는데, 오랜 세월을 죽지 못하고 살아서 온 몸에 바다 생물들이 덕지덕지 붙은 끔찍한 모습으로 나온다.
고약한 심보지만, 한 회사에서 몇십 년씩 근무하면서 같은 직급에 머물러있는 사람들을 만날 때, 빌 터너를 보는 것처럼 흠칫 놀라고 만다. 도대체 왜 몇십 년 넘는 세월을 한 배에 탄 채로, 그것도 같은 직급으로 머물러있는 생활을 택한 걸까?
지금 같이 일하는 팀에서 꼭 터너 부자를 보는 것 같은 광경이 벌어지고 있다. 정년을 5년 앞둔 mid-weight 디자이너와, 입사한 지 1년 만에 senior가 된 90년생 디자이너. 둘은 같은 프로젝트에 배정받았다. Mid-weight 디자이너가 senior에게 컨펌을 받는 것뿐인데, 둘을 보고 있으면 역할이 바뀐 것 같다. 다행히 둘 다 쿨하게 자신의 직급을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회사에서 20년 넘게 일한 mid-weight의 배경지식과 경험을 존중하면서, 터너 부자는 잘 지내는 중이다.
저주가 아니라 마이웨이
빌 터너 같은 mid-weight 디자이너에게 이 이상한 상황이 궁금해서 참지 못하고 물어봤다. 경험도, 실력도 있는데 도대체 왜 20년 가까이 senior로 승진하지 않았냐고. 굉장히 개인적인 질문이어서 살짝 걱정했는데, 호탕하게 웃으면서 대답해줬다.
자기는 일할 때 가장 즐거운 순간이 직접 자기 손으로 만들고 디자인하는 시간인데, 만약 승진하면 제일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고, 다른 디자이너들 관리하는 데만 시간을 써야 한다. 지금의 업무가 좋아서 회사에 다니는 거니까, 지금의 직급을 유지하기로 했다고. 우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이었다. 모든 사람이 높은 직급을 희망할 거라는 편견을 버려야 했다.
나이가 많을수록 경험도 많고, 직급도 높을 것이라는 편견.
영국에서 회사를 다니면서 깨기 어려웠던 편견 중에 하나다. 경험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영국 회사 문화에서, 나이는 평가 기준에 없다. 한 회사에 오래 다녔더라도, 다음 직급으로 승진하기 위해 요구되는 특정 스킬이나 업무 수준에 미치지 못하면 다음 직급으로 승진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우직하게 자기의 길을 가는 ‘마이웨이 타입’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터너 부자의 아버지 역할을 하고 있는 mid-weight 디자이너처럼, 지금의 자리와 업무가 너무 좋아서 떠나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회사가 보상해야 할까?
유연한 연봉제도
회사마다 다르겠지만,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는 직급과 연봉이 바로 직결되지 않는다. 같은 직급으로 오래 일한 사람에게는 근무한 햇수에 따라 연봉제도가 유연하게 적용된다. 결과적으로는 직급이 낮아도 경험에 걸맞은 연봉을 어느 정도 협상할 수 있다. 각자의 경험, 도전, 그리고 판단에 따라서 회사 안의 자신의 위치를 결정한다.
연봉 협상 외에도, 오랜 기간 맡은 업무에서 특정 지식을 쌓아온 사람에게 ‘챔피언’이라는 역할을 부여해서 다른 디자이너들에게 자신의 업무를 소개하고 특정 지식을 가르쳐주는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어떤 직급이라도 ‘마이웨이 타입’의 결정을 존중하고, 그들이 회사에서 보낸 세월을 함부로 무시하지 않는다.
더 높이, 더 많이, 굶주린 동물처럼 위만 보고 달렸던 커리어 계발 접근 방법을 잠시 되돌아봤다. 승진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것만 보다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회사를 다니는 사람들을 만나니까 갑자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다.
승진, 하고 싶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