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는 달을 따오라고 하지 않는다

by Rumierumie

런던에서 회사에 다닌 지 5년이 넘었는데도, 외국인이라 무시받을까 봐 겁이 난다.

혹시라도 실수할까 봐, 외국인이라고 더 손가락질받을까 봐 두려워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까 인생의 주인공이 회사인지, 나인지, 가끔 헷갈린다. 헷갈리는 자아를 미처 바로잡을 새도 없이 계속 앞으로만 달렸다. 하지만 직업은 나의 일부일 뿐, 자아를 잃어버리면 안 되는데, 마음에 경고등이 깜빡거린다.


직장 안에서 인생의 주인공 역할을 찾으려다가는 언젠가 실망한다. 회사 안에서 아무리 뛰어난 인재가 되어도, 우리는 회사의 주인공이 아니라 부속품이기 때문이다.

일도 좋고, 경험도 좋지만, 잊어버리지 말자. 내 인생은 내 거라는 것을.






불가능한 일을 시키지 않는다

런던에 락다운이 발표되던 2020년 3월, 기가 막힌 타이밍에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새로운 프로젝트는 방송국에서 만든 앱들을 통해서 보내는 알림 서비스의 경험들을 지금보다 더 사용자 중심으로 개선할 수 있는지 탐색하는 게 목표였다.

프로젝트 초기에는 항상 많은 물음표가 생긴다. 98년 된 지금의 회사는 정보가 많아도 너무 많아서 물음표 하나를 해결하려면 관련 있는 정보를 찾는 것부터가 일이다.


사용자 데이터는 어디서 가져오는지

현재 서비스 주변의 이해관계자 구조는 어떤지

앱마다 현재 사용자 여정은 어떻게 생겼는지


파고들어가다가 정보에 파묻혀서 길을 잃었다.

어휴, 어딘가 빠지거나 연결되지 않은 채로 돌아가는 알림 서비스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 막막했다.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적어봤지만, 프로젝트 규모에 비해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적어 보였다. 혼자서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할지도 몰랐다.


걱정이 와르르 몰려왔다. 회사 측에서 봤을 땐 이게 가능한 일인데, 내가 부족해서 불가능하게 만드는 건가?

정보와 걱정의 구렁텅이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어서 라인 매니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와 고민거리를 30분쯤 듣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It’s a great starting point.”




시작 가능한 것부터 차근차근

라인 매니저가 칭찬한 것은,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적은 리스트였다. 아직 손대지 않은 계획일 뿐인데, 시작점을 잘 잡았다고 한 것이다. 한 술 더 떠서, 계획한 내용 중에서 몇 가지는 자기가 다른 부서에 아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같이 커피 마시면서 물어보라고 이메일로 금세 미팅도 잡아줬다. 아직 한 게 하나도 없냐고 핀잔을 들을 줄 알았는데, 칭찬을 하니까 얼떨떨했다.



알고 보니, 이 프로젝트는 당장 결과물을 낼 수 있는 타입의 과제가 아니었다. 프로젝트 관계자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도 크고, 이해관계자들이 함께 동의해야 진행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 추가적인 리소스와 도움이 필요한지 적었던 리스트가 도움이 되었던 거다.


프로젝트 브리프가 처음 나에게 주어졌을 때, 항상 회사가 당장 해결책과 결과물을 가져오라고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우선 어떻게 시작하고 싶은지, 그 시작점을 정하고, 당장 불가능한 점이 있으면 그것도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 거였다.


때로는 프로젝트 관계자들이 생각한 규모와, 실무자들이 생각하는 업무의 규모가 다르기도 하다. 그럴 때는 개인적으로 프로젝트 목표와 과제를 분석하고, 어떻게 접근할지 생각하고 난 뒤에, 프로젝트 담당자들과 의견을 나눠서 단계별로 어떻게 수행할지 같이 동의하면 된다.




회사 일이 재미있을 때는,

달도 따다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착실하게 걸음마를 배우면서 프로젝트를 진행했더니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얻었다. 시스템 매핑이나 데이터 구조도 작성 같은 스킬도 생겼고, 평소에 같이 일하지 않던 부서 사람들과도 점점 네트워크 영역이 넓어졌다. 항상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들을 이 프로젝트를 통해서 조금씩 채우다 보니, 일이 좋아져 버렸다.


일과 사랑에 빠지면 위험하다. 하나둘씩 결과물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면, 뿌듯해서 계속 더 하고 싶어 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워라밸이 무너졌다. 브런치에 꾸준히 글을 쓰기로 한 나와의 약속을 어기고, 산책하는 시간을 점점 뒤로 미뤘다. 프로젝트 아이디어가 생각나서 한참 필기하다가 저녁으로 먹으려던 떡볶이가 다 쫄아들어버릴 때까지 정신을 놓은 날. 냄비 바닥에 눌어붙은 떡볶이를 떼면서 생각했다.


가만있자, 이 프로젝트가 잘 되면 도대체 뭐가 좋은 거지?




회사는 자아를 찾아주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분야의 업무를 맡으니까 더 잘하고 싶었나 보다.

UXA 업무 중에서 서비스 디자인을 활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아주 부분적이어서 답답했었다. 회사 덩치가 크다 보니까 각 부서별로 지식 공유를 하는 것에 한계가 있고, 부서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 되는 부분도 있었다.


이번 프로젝트는 서비스 디자인 방법론을 많이 사용하는 데다가, 새로운 이해관계자들을 포함해서 진짜 콜라보레이션할 기회가 있다 보니까 흥이 났다. 이 프로젝트가 부서 간의 콜라보레이션을 잘 해내는 성공 케이스가 되면, 꼭 내가 성공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업무의 성과가 곧 나라고 착각하는 순간, 떡볶이는 다 타버렸다.




일을 떠나서 하는 숙제

지금 회사에 입사한 후, 어느새 두 번째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다. 그 말은, 작년에 이어서 두 번째 PDR을 할 시기가 왔다.


PDR은 Personal Development Review의 줄임말이다. 회사에서 지난 1년 동안 했던 업무와 경험을 되돌아보고 잘한 점과 아쉬운 점을 회고하는 리뷰 시간이다. 주로 라인 매니저랑 같이 한 시간쯤 이야기하면서 지난 1년을 적어보고, 원한다면 같이 일했던 동료들에게 피드백을 요청해서 참고할 수도 있다. PDR마지막에는 내년에 어떤 점들을 개선 또는 개발하고 싶은지 계획을 세운다.


같이 일한 동료들 네다섯 명에게 피드백을 요청했는데, 작년에 비해서 훨씬 많은 부분에서 칭찬과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았다. 라인 매니저와 같이 작년 PDR을 훑어보면서 올해 얼마나 많은 것들이 추가되었는지 보고 놀랐다. 분에 넘치는 칭찬에 신이 나서 내년에는 더 많은 일들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라인 매니저가 조금 시큰둥하다.


혹시, 일하고 관련 없이
개인적으로 성취하고 싶은 것은 없어?



외국어를 배우거나, 새로운 취미활동을 하거나, 일을 떠나서 나를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하면서 라인 매니저는 내년의 action plan에 빈칸을 하나 만들었다. 참고로, 그녀의 취미는 디제잉이다. 취미로 한다지만, 실력이 좋아서 작은 클럽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는데 초대를 받아서 남편이랑 같이 구경 간 적도 있다.



Work is work

당장 대답할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PDR을 마치고 생각했다. 회사의 숙제를 하느라 내 인생의 숙제는 까먹고 있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전 직장에서도 개인적인 목표와 꿈을 거의 잊어버리고 살았다가 사춘기를 크게 겪었었다. 직장 생활에 만난 사춘기는 퇴사와 유학이라는 큰 획을 그었었다. 좋은 경험이지만, 이번에는 워라밸을 잘 지키면서 내 인생도 잘 돌보겠다고 다짐했는데 또 잊어버린 것이다.


영국에서 회사 생활을 하면서 가끔 병가를 내거나, 개인적인 일 때문에 휴가를 쓸 때 항상 듣는 말이 있다. “일은 일이지, 일 때문에 너의 중요한 순간들을 놓치지 마.” 이번에도 중요한 순간을 또 놓치고 있구나 싶었다. 다음날, 라인 매니저에게 연락해서 함께 빈칸을 채웠다.


브런치에 꾸준히 글을 쓰고, 발행하는 것.

내년 이맘때쯤에 뿌듯한 마음으로 이 칸을 바라볼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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